"아, 끔찍해" 부잣집 사모님 '충격'…잔인한 실험의 정체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입력 2024-10-26 05:01   수정 2024-10-26 10:04



“아…. 끔찍해. 더는 못 보겠어요.”

여기는 18세기 영국의 한 부잣집. 창문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과 촛불에 의지해 과학자의 실험을 관람하던 한 여성은 고개를 돌리고 말았습니다. ‘공기 펌프 실험’ 견학이란 이름으로 열린 이 행사의 내용은, 유리로 된 새장 안에 새를 가둬 놓고 공기를 빼내 새를 기절시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지금의 상식으로는 말도 안 되는 동물 학대지요. 여성 옆에 있는 소녀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새를 지켜보고 있네요.



반면 앉아 있는 두 남성과 소년은 이 실험에 푹 빠져 있습니다. 왼쪽에 있는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실험에는 아예 관심이 없고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네요.

불행 중 다행인 건, 적어도 새의 생명이 무사할 거란 사실입니다. 당시 앵무새는 굉장히 몸값이 비쌌거든요. 강연장과 부잣집을 돌며 실험을 보여주는 일로 먹고 사는 이 과학자가 새를 죽게 둘 리가 없습니다. 곧 과학자가 유리에 다시 공기를 불어 넣으면 앵무새는 깨어날 겁니다.

당시에도 이런 실험이 충격적이고 잔인하다는 비판은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영국에서는 왜 이런 실험이 반복됐을까요. 그때의 상황, 인류 역사상 가장 급격하게 기술이 발전했던 그 시기에 있었던 빛과 어둠을 그린 거장 조셉 라이트(1734~1797)의 삶과 작품을 풀어 봅니다.
기술의 빛과 어둠
새로운 혁신적인 기술이 등장할 때는 늘 빛과 어둠이 있습니다. 기술이 발전하면 사회가 전체적으로 풍요로워지는 건 사실입니다. 효율이 올라가면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게 늘어나니까요. 하지만 개개인의 입장에서는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거대한 변화가 닥치면서 여러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생기고, 내 직업이 사라질 수도 있고, 전반적인 분위기와 제도가 확 바뀌면서 평생 살아왔던 방식을 바꿔야만 하니까요. 예컨대 우리 집 앞의 음식점들만 봐도 알 수 있지요. 키오스크가 도입되고 서빙 로봇까지 생기면서 직원이 줄고 있고, 인공지능(AI)의 발달로 단순한 사무 작업을 하는 일자리도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변화가 가장 극심했던 시기 중 하나는 17세기 후반 유럽입니다. 그전까지 대부분의 유럽 사람들은 모든 걸 신의 뜻으로 설명했습니다. 풍년이 드는 것처럼 좋은 일이 생기면 신의 축복이라고 생각했고, 전염병이 돈다거나 나쁜 일이 생기면 신이 분노해서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160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과학혁명’, ‘산업혁명’, ‘계몽주의’가 세상을 크게 바꿨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아이작 뉴턴 같은 과학자들이 자연의 법칙들을 밝혀냈고(과학혁명), 무슨 일이 벌어지면 신의 뜻이라고 믿지만 말고 머리를 써서 이유를 찾아보자는 생각이 퍼졌는데(계몽주의), 비슷한 시기 증기기관을 비롯해 새로운 기계가 발명되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크게 늘어난 겁니다(산업혁명). 과학으로 자연을 이해하니 새로운 기계를 만들 수 있게 됐고, 더 많은 사람이 배우고 생각하게 되니 더 많은 발명이 이뤄졌는데, 이런 새로운 기계들 덕분에 문명과 사회가 더 발전한 겁니다.



이런 커다란 발전이 일어난 가장 대표적인 곳이 영국이었습니다. 영국은 여러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증기기관이 처음으로 발명된 산업혁명의 발상지. 과학에서도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 중 하나인 뉴턴이 있어 앞서나갔습니다. 의회 민주주의가 발달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기도 좋았고, 석탄이 많아서 공장을 돌리기도 좋았고요.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다른 나라의 방해를 덜 받기도 했고, 식민지가 많아서 돈과 자원도 많았습니다. 결국 이런 요소는 유럽 서쪽 끄트머리의 섬나라 영국이 한때 전 세계를 호령하는 최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하지만 빛이 밝으면 그늘도 그만큼 짙은 법. 기술과 문명의 발전에는 여러 부작용도 따랐습니다. 대표적인 게 제국주의입니다. 이렇게 먼저 발전을 이룩한 나라들은 물건을 만들기 위한 원료가 필요했고, 만든 물건을 내다 팔 시장도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세계 각국에 식민지를 만들었습니다. 식민지가 된 나라들의 발전이 늦었던 건 여러 조건 때문이 아니라 거기 사는 사람들이 열등해서라는 생각이 퍼지면서, 식민지인에 대한 각종 차별과 불이익도 잇따랐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우리나라도 그 피해자 중 하나입니다.



여러 가지 부작용은 같은 영국 안에서도 있었습니다. 기술의 발전 속도를 사람들의 생각과 사회 제도가 따라가지 못하면서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의 대기오염(스모그)을 비롯한 환경오염, 극심한 빈부격차, 어린아이들까지 16시간 이상 노동시키는 노동 착취, 숱한 산업 재해와 교통사고, 사람들의 우울과 불안 등 여러 심각한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라이트는 이런 기술 발전의 ‘빛과 어둠’을 최초로 주목한 화가 중 하나였습니다.
과학이 곁으로 다가왔을 때
라이트는 1734년 영국 중부의 도시인 더비에서 태어났습니다. 런던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산업 혁명의 중심지 중 하나로서 번영하던 산업 도시가 더비였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남부러운 것 없었습니다. 라이트의 아버지는 지역사회에서 존경받는 변호사였고, 위로는 두 명의 형이 있어서 가문을 책임질 필요도 없었지요. 셋째 아들이 화가가 된다고 했을 때 밀어주기 충분한 환경이었다는 얘깁니다.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라이트는 17세의 청년 시절인 1751년 런던으로 가서 2년간 미술을 공부한 뒤 런던과 더비, 리버풀을 오가며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화가로서의 시작도 성공적이었습니다. 귀족의 초상화나 역사, 신화 속 이야기를 주로 그린 당시 주류 화가들과 달리 라이트는 당시 도시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주목했습니다. 그가 특히 관심을 가졌던 건 과학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의 강연장이나 부유층의 집에서는 과학과 관련한 일종의 ‘쇼’가 자주 열렸습니다. 과학자가 장치를 가져와 실험을 보여주고 그 뒤에 숨은 과학의 원리를 설명한 뒤 돈을 받는 행사였지요.

대표적인 게 태양계를 재현한 기계 모형을 보여주며 지구와 태양, 다른 행성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알려주는 강연이었습니다. 라이트는 이런 쇼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과학의 발전은 정말 대단해. 이 세상에 숨겨진 원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종교 못지않아.” 그래서 그는 종교를 소재로 한 그림에 자주 쓰이던 극적인 묘사, 빛과 어둠을 이용한 신비로운 분위기 연출을 과학 그림에 사용했습니다. 이런 참신한 시도와 탁월한 실력에 영국 미술계는 찬사를 보냈습니다.



앞서 살펴본 ‘공기 펌프 실험’도 당시 유행하던 실험 중 하나. 돈을 받고 실험을 보여주는 과학자들은 이런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신선한 공기’의 중요성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여러분에게 생물이 살아가는 데 있어 공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집에서 장작을 땔 때 환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줄 겁니다. 여러분이 공기의 중요성을 잘 모른다면, 이 유리장 속 새와 같은 운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공기 펌프 실험은 태양계를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쇼 비즈니스’에 가까웠습니다. 명백히 동물을 고문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고, 당시 사람들도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라이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직감했습니다. ‘기술이 발전한다고 다 좋은 건 아니야. 저 동물이 과학 실험이라는 명목으로 희생되는 것처럼, 사람도 얼마든지 희생될 수 있겠어. 모든 것에는 빛과 어둠이 있는 법이구나.’ 그리고 점차 라이트는 과학을 넘어 ‘빛과 어둠’이라는 더 큰 주제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라이트의 어둠, 그리고 빛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부터 라이트의 삶에서는, 그의 그림처럼 빛과 어둠이 극적으로 교차하기 시작합니다. 과학 실험을 다룬 작품들로 20대부터 명성을 얻었지만 라이트에겐 이게 오히려 독이 됐습니다. 이전보다 더 뛰어난 신작을 발표해야 한다는 극심한 압박감에 시달리게 된 겁니다. 결국 그는 우울증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라이트는 예민하고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이른 나이의 성공이라는 빛이 마음의 부담이라는 어둠을 드리운 셈입니다.

그는 점점 외출하지 않게 됐고,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고립되기 시작했습니다. 39세이던 1773년 결혼하고 세 아이를 키우게 되면서 그의 우울증은 더 깊어졌습니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압박감이 컸다고 라이트의 여동생은 훗날 전했습니다.

마흔다섯 살이던 1779년, 예술의 중심지인 런던을 완전히 떠나 고향인 더비에서 은둔 생활을 시작한 것도 우울증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은둔한 사람과 외로운 죄수, 고독하고 슬픔에 잠긴 인물 등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라이트는 화가들을 비롯해 거의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집 밖으로 나가야 할 때면 해가 진 뒤에야 길을 나서곤 했습니다. 극심한 우울증 때문에 오랜 기간 동안 붓을 들지 못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 탓에 라이트는 자기 작품을 발표하고 널리 알리는 데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반면 그의 예술 세계는 갈수록 깊어졌습니다. 마치 그림 속에서 구원이라도 찾는 것처럼, 그는 점점 더 빛과 어둠이 주는 효과 묘사에 몰두했습니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우연히 보게 된 화산 폭발을 표현하면서 그의 빛에 대한 이해는 더 깊어졌고, 밤에만 돌아다니는 은둔 생활을 하면서 어둠과 슬픔에 대한 표현은 깊이를 더했습니다. ‘죽은 병사’(1789)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당대 영국에서 이 그림은 라이트의 작품 중 최고로 평가받았습니다. 18세기 후반 미국 독립 전쟁을 비롯한 여러 전쟁에 나가 목숨을 잃은 영국인 군인들, 그리고 가족들의 슬픔이 주제라는 해석이 많습니다.

그렇게 우울증과 싸우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던 라이트는 1797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나이 63세였습니다.
예민한 눈과 용기
오늘날 라이트는 영국의 18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내셔널갤러리와 테이트 브리튼 같은 영국의 주요 미술관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다만 현대인들이 그의 그림에서 중점적으로 조명하는 건 아름다운 빛과 어둠의 묘사가 아닙니다. 라이트가 포착하고 기록한 당대 과학 발전의 모습, 그 안에 담긴 인간의 이야기가 주된 관심사입니다.

라이트는 누구보다도 섬세하게 빛과 어둠을 포착할 수 있는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였습니다. 덕분에 라이트는 다른 화가보다 과학의 발전이라는 주제를 빠르게 발견할 수 있었고, 그 이면의 고통과 희생을 발견했으며, 자신의 우울과 고독까지도 예술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반면 이런 예민함이 스트레스로 작용하면서 라이트는 평생에 걸쳐 우울증으로 고통받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라이트도 산업혁명과 과학혁명이라는 거대한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기가 버거웠던 건 아닐까요. 그래서인지 그의 후기 작품들은 비록 유명하지도, 그 시대의 현안을 다루지도 않지만 가슴 한구석을 쿡 찌르는 듯한 뭔가 저릿한 느낌을 줍니다.



라이트가 태어난 지 300년 가까이 흘렀습니다. 우리는 또 다른 기술 혁명의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만약 라이트의 삶과 작품이 특별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우리가 그의 예민한 시선과 불안에 어느 정도는 공감하기 때문일 겁니다. 차근차근 익히며 배워가기에는 지나치게 빠르게 변하는 사회. 무슨 말인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하게 발전하는 기술, 주변에서 친숙한 것들은 소리 없이 사라져 가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뒤처져 덩그러니 남겨질 거라는 불안이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라이트가 자신의 삶과 예술을 통해 보여준 빛과 어둠에서 배운다면, 이런 험난한 시대를 살아나가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이 듭니다. 라이트처럼 새로운 기술이 가져다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는 용기, 그 빛과 어둠을 세심하게 살피는 예민한 눈과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과감히 받아들여 장점으로 만드는 행동력. 라이트와는 반대로 변화에 잡아먹히지 않을 굳센 심지 같은 것들 말입니다.

오늘 준비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i>**이번 기사는 'Joseph Wright of Derby'(Matthew Craske)를 중심으로 런던 내셔널갤러리 홈페이지의 작가 설명, 'Joseph Wright of Derby: 1734~1797'(Jane. Wallis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i>

지난 3월 출간돼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은 <명화의 탄생, 그때 그 사람>의 후속작이 다음달 초 출간됩니다. 제목은 <명화의 발견, 그때 그 사람>입니다. 막바지 작업, 재충전과 새로운 시작을 위해 출간 전까지 연재는 1~2주 쉬어 가겠습니다.

주요 전시와 미술시장, 재미있는 국내외 미술 소식에 관한 기사는 그동안에도 쉼 없이 계속됩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6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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