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ARM과 미국 퀄컴이 오는 12월 프로세서 개발 특허 라이선스 관련 소송을 앞두고 날 선 비방을 주고받고 있다. 반도체 설계도의 밑그림인 ‘설계자산’(IP)을 판매하고 수수료를 받는 ARM과 IP를 활용해 칩을 개발하는 퀄컴은 오랜 기간 공생 관계를 유지했다.
갈등이 불거진 건 인공지능(AI) 반도체 시대가 시작되면서부터다. AI 칩 설계·개발 주도권을 갖고 싶은 퀄컴이 ‘탈ARM’을 시도했고, 최대 고객의 이탈 움직임에 ARM은 소송을 예고하며 압박하고 있다. AI 기기용 반도체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기술력을 키워 협력사 의존도를 낮추고 시장을 독식하려는 기업들의 움직임이 확산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25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ARM은 지난 23일 퀄컴에 라이선스 해지를 통보했다. 두 회사가 합의하지 못하면 퀄컴은 12월 22일부터 ARM의 IP를 사용할 수 없다. 퀄컴은 ARM IP를 기반으로 칩을 개발하고 있다.
ARM과 퀄컴은 글로벌 반도체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회사들로 꼽힌다. ARM은 세계 모바일 칩 IP의 99%를 점유하고 있다. 퀄컴은 ARM의 IP를 기초로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를 만들어 삼성전자, 구글, 화웨이 등 안드로이드 기반 스마트폰 제조사에 공급한다. ARM의 IP를 쓰지 못하면 AP 제작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2020년까지 두 회사는 핵심 협력사로서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퀄컴은 ARM 모바일 IP 매출의 34%(2021년 말 기준)를 차지하는 최대 고객사였다. 퀄컴은 자사 칩 제조 전 과정에 ARM 설계도를 활용했다. 하지만 2021년 퀄컴이 PC용 중앙처리장치(CPU) 설계 전문 기업 누비아를 인수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퀄컴이 PC용 프로세서 개발 과정에서 ARM 의존도를 낮추는 전략을 추진하면서 관계가 틀어졌다.
ARM은 모바일 분야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PC 칩 고객사 확대에 사활을 걸고 있다. ARM은 퀄컴과 합의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2022년 8월 퀄컴에 계약 위반 및 상표권 침해 소송을 걸었다. 두 회사는 12월 본안 소송을 앞두고 있다.
두 회사의 갈등에 대해 반도체 업계에선 “급변하는 AI 반도체 산업의 단면”이란 분석이 나온다. AI PC·스마트폰 출하량이 늘면서 AI 기기용 반도체 시장을 선점하려는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퀄컴뿐만 아니라 엔비디아, AMD 등도 AI PC용 프로세서 시장에 뛰어들었다.
특정 고객사 의존도가 높은 것이 AI 반도체 시대엔 ‘부메랑’이 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퀄컴 입장에서는 ARM과의 소송 결과에 따라 자사 칩이 들어간 고객사 제품의 출하 중단 사태를 맞을 수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삼성 등 고객사가 출하 중단에 따른 피해 책임을 퀄컴에 돌리면 2차 소송전으로 번질 수도 있다. 업계 관계자는 “특정 기업 거래 비중이 높으면 리스크도 커진다는 것을 ARM과 퀄컴 모두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기술력’이란 평가도 나온다. 반도체 기업 관계자는 “대만 TSMC가 고객사인 엔비디아 앞에서 설계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독보적인 생산 기술력을 갖췄기 때문”이라며 “AI 칩 시대엔 기술력에 따라 언제든지 갑과 을이 바뀔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의명 기자 uimy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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