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이 고공행진을 하고 있다. 지난 11월 서울 외환 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1400원을 훌쩍 넘어섰다. 2022년 11월 7일 이후 2년 만에 최고치다. 미국 공화당이 대통령과 상·하원 선거를 싹쓸이하는 ‘레드 스위프(red sweep)’ 여파로 달러 강세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2기 출범 초기 경기 부양 기대로 '킹달러 시대'가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내년 하반기부터 미국과 다른 나라 간 금리 차가 줄어들고 외국인직접투자(FDI) 유입이 감소하며 점차 강달러 압력이 약해질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아메리카 퍼스트·달러 퍼스트"
코로나19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글로벌 외환 시장은 미국 중앙은행(Fed) 중심의 통화 정책에 따라 움직였다. 미국과 다른 국가와의 금리 차이도 환율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미국이 다른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제가 견조하거나 미국의 경기 우위 전망이 지속될 경우 달러 강세 압력이 커졌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의 임기 초 달러 강세 기대가 확산한 배경이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고 공화당이 양원을 장악하게 되면서 미국은 감세 정책과 재정 지출 확대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법인세율을 21%에서 15%로 낮추는 감세 공약을 내놨다. 골드만삭스는 이 정책이 실행되면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기업들의 주당순이익(EPS)이 향후 2년간 약 20% 증가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국 기업들의 실적 개선은 경제 성장으로 이어지고 중장기적으로 미국 주식 시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미국 기업에 투자하려는 해외 자금이 유입되면 달러 수요가 증가하고 이는 달러 강세 흐름을 부추길 수 있다.
전 세계 경제가 위축된 가운데 미국 경제만 호황을 보이는 예외주의도 달러에 힘을 실어주는 요인이다. 일부 경제전문가들은 내년에도 미국 경제가 승자독식하는 상황이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최근 미국의 성장률이 주요국 성장률을 압도하고 있어서다. 트럼프는 해외 기업에 관세를 부과하는 등 보호무역주의 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칠 것으로 보인다. 미국 제조업 부흥과 패권경쟁 우위 확보, 무역 적자 축소 등을 목표로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미국 우선주의)'에 드라이브를 걸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은 달러의 입지를 더욱 굳건하게 할 전망이다. 여기에 미국 경기 호조로 인플레이션이 이어지고 고금리가 장기화한다면 당분간 달러를 약화할 동력이 사라질 수 있다.
달러가 지나치게 강세일 경우 이론적으로는 수출 경쟁력 저하, 기업 이익 감소, 투자 부진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러나 코로나19 이후 달러지수와 미국 제조업의 신규 주문은 양(+)의 상관관계를 보인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인공지능(AI) 등 혁신 기술을 앞세운 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급성장하며 해외 투자금이 미국으로 쏠린 영향이다. 권아민 NH투자증권 연구원은 "강달러 심화가 곧바로 미국 펀더멘털 약화를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트럼프 대통령 집권 초기엔 강달러 구도에서도 미국의 경제적 펀더멘털이 견고하게 유지될 수 있다"고 말했다.
대항할 통화가 없다…유로·위안화도 약세
달러화의 추세는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대미 무역수지 흑자국에 대한 통상 압박 여부에 따라 변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무역수지 흑자 축소와 국제수지 불균형 조정에 집중할 경우 일본과 중국 등 주요 교역 상위국의 통화 약세를 견제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달러화 강세가 이어지며 원·달러 환율은 1400원에서 등락하거나 안착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정치적, 경제적 요인 외에도 불확실한 미국 통화 정책 기조는 달러 강세 국면을 연장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의 당선으로 Fed의 독립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제롬 파월 Fed 의장은 최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 "임기 내 퇴임은 없다"고 밝혔으나, 트럼프와 불화설로 사임 압력이 거세질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트럼프는 집권 1기 때인 2018년 Fed의 금리 정책을 놓고 파월과 의견 충돌을 빚었고 당시 파월 의장의 해임을 거론한 적이 있다. 일각에선 트럼프가 취임한 후 Fed와 관계가 악화하면 통화 정책이 흔들릴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달러화를 안전자산으로 선호하게 만드는 유인이 된다.
달러에 대항할 통화가 없다는 점도 문제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경제가 침체하며 유로화 약세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일본은 여소야대 구조 속에 엔화 강세 전환이 쉽지 않다. 중국도 10조 위안 규모의 부양책을 발표했지만, 실물경기가 살아나지 않고 있어 위안화 약세 기조가 이어지고 있다. 미국의 고율 관세 부과에 대비해 중국 정부가 의도적으로 위안화 가치를 약세로 유도할 가능성도 커졌다.
환율 시장에선 강달러가 이어지며 원·달러 환율 1400원대가 '뉴노멀'이 되는 것 아니냐고 우려한다. 과거 1400원대 환율이 한국 경제에 타격을 입힌 전력이 있어서다. 박상현 iM증권 연구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는 내년 1월까지 1400원을 중심으로 등락하거나 추가할 가능성이 있다"며 "그러나 신용스프레드와 신용부도스와프(CDS) 추이로 볼 때 국내 금융 시장이 불안할 수준은 아니기 때문에 과도한 경계감보다는 유연한 환율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2025년 환율 '상고하저' 전망
전문가들은 내년 원·달러 환율이 상반기 강세를 보인 이후 하반기 완화되는 '상고하저(上高下低)'의 궤적을 보일 것으로 내다봤다. 상반기에는 트럼프 행정부의 재정 및 경기 부양 기대에 따라 강달러 흐름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지만, 트럼프 정부의 정책적 불확실성이 걷히고 Fed가 추가 기준금리 인하에 나서면 환율이 하락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트럼프 2기 정부가 미국 무역수지 개선을 위해 달러 약세를 선호하면서 강달러가 점차 해소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원화는 우리나라가 기준금리 인하 사이클에 진입하며 강세로 돌아서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시장에선 내년 한국은행이 2~3차례 추가 금리 인하를 단행할 것으로 보고 있다. 올 3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전기 대비 0.1%로 한국은행의 전망치를 크게 하회하면서다. 10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1.3%로 둔화하고 수입 물가도 6개월 만에 마이너스로 전환했다. 대내외적으로 금리 인하 여건이 조성되며 내년 상반기 최소 두 차례의 금리 인하가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올 상반기 수출도 많이 증가해 단기적으로 원화 강세 모멘텀이 크지 않다.
시장에선 내년 상반기 환율 상단을 1500원 선까지 열어둬야 한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NH투자증권은 내년 1분기 환율 상단을 1450원으로 제시했다. 조용구 신영증권 연구위원은 내년 1분기 환율 상단을 1425원까지 열어뒀다. 박상현 iM증권 연구원은 "트럼프 취임 전까지 환율 상단은 1450원으로 보고 있고 취임 이후 관세 정책이 시행되면 1500원까지 오를 수 있다"고 했다. 다만 환율이 1410원 이상 오를 경우 외환당국의 개입으로 가파른 추가 상승은 제한될 것으로 보인다. 권 연구원은 “1400원 부근에서 당국이 개입할 수 있다는 시장 경계감이 추가 상승 압력을 제한할 것”이라고 했다.
전예진 한국경제 기자 ace@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