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필자가 속한 로펌에서 부당노동행위, 저성과자, 그리고 직장 내 괴롭힘을 주제로 노동현안 세미나를 개최했는데, 세미나 종료 후 20분으로 예정된 질의응답 시간에 직장 내 괴롭힘에 관해 질문이 쏟아져 질의응답 시간을 1시간으로 연장하는 일이 있었다.
비단 질문 수만 많았던게 아니라 모든 질문에 HR 담당자들이 직접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겪은 생생한 현장의 고민이 묻어 있었다. 이 정도로 활발한 질의 응답은 특히 여러 기업이 공동 참여한 공개 세미나에서는 이례적이다. 그만큼 직장 내 괴롭힘 문제에 관해 갈수록 HR 담당자들의 고민이 다양해지고 또 깊어지고 있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자리였다.
아래에서는 당시 질의응답 중 공유할만한 몇 가지를 골라 가다듬어 적어 본다. 그간 자문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HR 담당자들께 필자가 평소 드리고 싶던 조언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사실 판단
“직장 내 괴롭힘의 특성상 사실관계에 관해 신고인과 피신고인의 주장만 있고, 서로 주장이 엇갈리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직장 내 괴롭힘을 주제로 발표할 때마다 매번 나오는 단골 질문이다. 원론적 답변을 한다면, 그 경우 엇갈리는 진술의 진정성, 합리성, 구체성, 일관성, 동기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판단해야 한다.
단, 여기서는 시간을 조금 거슬러, 신고를 접수한 초기 단기에 HR 담당자가 지녀야 할 올바른 관점부터 한번 짚어보자.
인사담당자는 사실관계 판단의 곤란과 동시에 그 임무의 막중함을 신고를 접수한 순간부터 일찌감치 예상하고 인식해야 한다.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의 사실 판단은 갈등이 일어난 구체적 맥락(종전 관계, 촉발된 원인, 빈도 등)을 미묘한 부분까지 잘 이해하고 피해자가 내면적으로 정신적 고통을 겪었는지, 그 고통이 직장 내 괴롭힘이라 할만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일이다. 매우 깊이 있고 세심한 접근이 필요하다. 따라서 그 판단이 어렵다는 것은 예정된 일이다.
그리고 인사담당자는 설령 사실이 애매하더라도 그 판단 책임을 미룰 수 없다. 반드시 적시에 최선의 판단을 내려야 한다. 판단이 늘어지거나 명확한 최종 판단이 없으면 갈등이 깊어지고 악화된다.
인사담당자가 이런 올바른 이해 하에 시건 해결에 대한 각오와 책임감이 투철한 경우, 당사자 진술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소극적이고 피상적 조사가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한 적극적 조사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리고 그렇게 적극적으로 조사에 임하다 보면, 엇갈리는 당사자 진술의 신빙성 정도가 선명해지고, 동료 증언, 텍스트 메시지, 과거의 언행 등 관련 증거가 풍부하게 확보되어 진상이 저절로 드러날 때가 많다. 처음에는 당사자 주장이 엇갈리더라도 종국에는 별 고민 없이 사실 판단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그렇게 적극적 조사를 하더라도 사실 판단이 어쩔 수 없이 애매한 경우는 나온다. 직장 내 괴롭힘 신고는 대개 하나의 언행만 문제삼지 않고 다른 시간, 장소에서 발생한 여러 언행을 모아 이루어지므로 그 어려움이 더해진다.
이 경우에는 HR 담당자는 기본으로 돌아가 당사자들 진술의 진정성, 합리성, 구체성, 일관성, 동기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책임성 있는 판단을 내려야 하는데, 그 기준은 '고도의 개연성'(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경험칙에 비추어 모든 증거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볼 때 어떤 사실이 있었다는 점을 시인할 수 있는 정도)이다. '고도의 개연성'은 51% 심증은 넘고 십중팔구는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까지 요구하는 높은 기준이지만, 형사판결상 유죄인정에 요구되는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의 확신'에 이르러야 하는 정도의 높은 기준은 아니다(성희롱 판단 기준에 관한 것으로, 대법원 2020다281367 판결 참조).
이 시점에서는 무엇보다 냉철하고 사실에 입각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 피해자 보호라는 미명 하에, 혹은 별 근거 없는 허위, 과장, 과민 신고의 의심 탓에, 이런 고도의 개연성 기준보다 낮거나 높은 기준을 자의적으로 적용하는 잘못이 적지 않으니 늘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신고인, 피신고인, 노동조합, 시민단체 등 관련 당사자들 반발에 대한 두려움도 강단있게 이겨내야 한다.
그렇게 냉철한 판단을 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방편으로 △신고를 언행별로 나누고 각 증거를 열거해서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뒤에서 보듯이 ‘잡음’의 문제가 있지만) 가장 유사한 사례에서 내려진 하급심 판결들을 널리 찾아 그 기준에 따르며 △그 때까지 외부 전문가 조력을 받지 않았다면 외부 전문가에 판단을 의뢰하는 것을 고려하면 좋겠다. 사안이 중요하고 사실관계 판단이 어렵다면 복수의 외부 전문가에 문의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 잡음
“당국, 노동위원회, 법원에서 직장 내 괴롭힘 사건에 대한 판단이 일관되고 예측 가능하게 내려질 수 있을까?”
심리학자인 대니얼 카너먼 등의 저서 「노이즈 Noise: 생각의 잡음」을 보면, 동일의 가상 사안들에 대해 미국의 여러 판사들을 상대로 보석 인용에 대한 판단을 내리도록 해보니 개인 성향에 따라, 또 동일한 판사라도 언제 판결을 내리는지에 따라 결과에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는 실험 결과가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이렇듯 ‘편향 (bias)’이 없어도 판단자가 올바른 의사결정을 내리기 어렵게 만드는 요소를 ‘잡음 (Noise)’이라고 설명한다.
직장 내 괴롭힘에 관한 여러 판결문을 읽다 보면 이런 잡음이 있다고 의심될 때가 있다. 예컨대 △상사가 팀원에게 “노조활동을 하려면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등의 발언을 한 것이 직장 내 괴롭힘인지 문제된 사건에서 노동청과 법원의 판단(서울행정법원 2020구합70339 판결) △사내변호사에 대한 막말 등의 직장 내 괴롭힘이 문제된 사건에서 1심(대전지방법원 2020가합105450. 부정)과 2심(대전고등법원 2021나3620. 인정) 판결이 완전히 갈렸다. 직장 내 괴롭힘에 관한 노동청, 노동위원회, 법원의 판단에 잡음이 잦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시사하는 사례다.
이런 현실에서 HR 담당자는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은 법원 판단의 불확실성이 큰 점을 이해한 바탕 하에서, 이미 내려진 유사한 선례를 가급적 반대의 판단을 내린 사안까지 포함하여 종합 검토하고 △반드시 직장 내 괴롭힘 인정을 받아야 하는 사건이면 양정을 낮춰 보수적인 판단을 내리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
나아가 △보다 근본적으로, 최대한 법을 지키는 건전한 기업문화가 뿌리내리는데 주력하여 애초 직장 내 괴롭힘 문제 발생 자체를 줄이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세대 격차, 괴롭힘 제도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직장 내 괴롭힘 분쟁은 점점 늘어나고 있고 그 추세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이러한 분쟁들을 잡음의 위험이 있는 당국과 법원 판단에만 의존하여 일도양단으로 해결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기대와 달리 그로써 분쟁을 단기간에 끝내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시간과 비용의 낭비, 기업문화의 훼손을 감수하기보다는 활발한 캠페인, 맞춤형 교육 등을 통해 법이 요구하는 것보다 기업 구성원의 대응 감수성 수준을 높여 원천적으로 직장 내 괴롭힘 발생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더 효과적이며 근본적인 방안이다.
# 무관용 정책
“사소한 직장 내 괴롭힘도 반드시 엄정징계하는 무관용 정책을 시행할 때 고려사항이 무엇일까?”
이 질문은 최근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페이스북(Facebook)이 무료식사권(free meal voucher)을 치약, 세제 등 생활용품 구입에 악용한 직원들을 무더기로 해고 조치한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40만달러의 고연봉을 받는 직원도 그 중 포함되어 있음에도 가차없이 단호한 조치를 취한 점에서 화제가 되었다.
이런 직원 비위행위에 대한 무관용 정책은 (세부 내용은 다르지만) 페이스북이나 질문을 한 인사담당자가 속한 기업 뿐 아니라, 직장 내 괴롭힘으로 사회적 물의를 빚고 당국의 근로감독을 받거나 여론 비난을 받은 경험이 있는 기업 등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일반론으로 말하면, 이런 직장 내 괴롭힘에 관한 무관용 정책은 장점이 많아 충분히 고려할만하다. 직장 내 괴롭힘 예방과 대응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기업이라면 자연스럽기도 한다. 일관성있게 장기가 실행되면 시간이 지날수록 예방 효과가 높아지고, 그러한 선례가 추후 법원에서 긍정적으로 고려될 것도 기대할 수 있다. 예컨대, 판결 중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에 대한 해고가 정당하다고 하면서, 기업이 폭행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후 재발방지를 위하여 '무관용 원칙'을 수립·시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벌어진 직장 내 괴롭힘인 점도 한 근거로 든 판결이 있다(서울행정법원 2020구합64118 판결).
단, HR 담당자는 이러한 무관용 정책의 한계와, 그 한계를 넘어설 때 예상되는 부정적 효과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무관용 정책은 기업이 독자적으로 내린 경영상 결단이다. 앞서 보듯이 법원은 그런 결단을 존중하지만, 기본적으로 피신고인이 근로자로서 가진 권리와 조치의 형평성을 더 중요하게 고려한다. 따라서 반드시 기업의 무관용 원칙에만 따르지 않는다. 즉, 징계양정에 있어 무관용 원칙을 고려할 때도 있지만, 그것은 여러 고려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무관용 정책에 따라 직장 내 괴롭힘 사건에서 무리하게 피신고인을 중징계했는데, 피신고인이 불복하고 나중에 기업이 패소했다고 해보자. 무관용 정책은 공적 인정을 받을 때 비로소 강력해 지는 것이다. 따라서 무관용 정책이 부정되는 사태가 생기면 동력을 잃으며 오히려 역효과를 남길 우려가 있다. 처음부터 합리적 징계를 하여 직원이 개과천선할 기회를 주고, 계속 비위행위가 반복될 때 해고 등 중징계를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나은 선택이다.
소위 오피스 빌런에 해당하는 상습적 가해자에 대한 대응은 원래 시간이 걸리는 일이니 장기전(長期戰)으로 생각하고 대응해야 하는데, 무관용 정책으로 억지로 그 시간을 단축하려는 것은 위험하다.
특히 진정성 있게 기획되고 구성원들에게 교육 등을 통해 충분히 공감을 받은 채 체계적으로 시행되는 것이 아닌, 사건에 임해 그때 그때 경영진의 즉흥적 판단에 따라 강경책이 이루어지는 것은 문제다. 이는 ‘무관용 정책’이라 이름 붙이더라도 진정한 무관용 정책이 아니다.
결국, 무관용 정책을 펼치는 것은 좋지만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을 대할 때 균형(均衡)과 중용(中庸)을 지켜야 한다. 무관용 정책은 균형과 중용을 잃은 판단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없다.
오늘도 건전한 기업문화 달성에 고심할 HR 담당자분들께 마음을 담아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조상욱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노동조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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