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신탁인지 뭔지 몰라요…밀린 공사비나 주세요" [김용우의 각개전투]

입력 2024-11-19 07:00   수정 2024-11-19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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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 현장마다 원청인 종합건설업체와 계약을 맺고 전문공사를 수행하는 수많은 협력업체가 있다. 협력업체는 현장에서는 '하청', 법적으로는 '하수급인(건설산업기본법)' 또는 '수급사업자(하도급법)'라고 불린다. 하청은 발주자가 아닌 원청과 공사도급계약을 맺고 원청으로부터 공사대금을 받으므로, 일반적으로 원청의 규모나 신용을 고려해 협력업체로 참여할지 결정한다.

반면, 하도급법과 건설산업기본법은 일정한 경우 하청이 발주자로부터 직접 공사대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하도급법 제14조 제1항, 건설산업기본법 제35조 제2항). 발주자와 직접적인 거래관계가 없어도 하청을 보호하기 위해 발주자와의 '직접지급합의'가 있거나, 원청의 파산 등 지급불능사유가 발생하면 하청이 발주자에 직접 공사대금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한 거다. 하청의 자재와 비용으로 완성된 최종 이익은 발주자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발주자가 하도급 공사대금을 지급하라는 것이다.

이 경우 하청은 원청보다는 발주자의 규모와 신용도를 주로 염두에 두고 협력업체에 참여할지 여부를 결정한다. 시공 전에 발주자와 직접지급합의를 할 경우 더욱 그렇다. 이런 현장을 흔히 '직불현장'이라 부른다.
신탁사가 발주자로 참여하는 PF
프로젝트파이낸싱(PF·Project Financing) 사업장의 양상은 다르다. PF 사업장의 발주자는 원칙적으로 영세한 시행업자, 즉 디벨로퍼다. 부지를 확보하고 사업 아이템이 좋더라도, 자기자본율이 낮고 대개 특수목적법인(SPC)인 시행사의 신용도는 하청에게 의미가 없다.

다만 PF 사업장은 PF 대출 때 부동산신탁사가 직접 발주자로 사업에 참여하는 '관리형 토지신탁' 계약을 맺는다. 신탁사가 전면에 나서 발주자로서 PF 사업장을 이끌고, 하청과도 다시 직접지급합의를 한다. 발주자가 유명한 신탁사인 사업장인 경우, 하청은 "적어도 돈 떼일 염려는 없다"고 안심한다.

부산에서 오피스텔과 근린생활시설을 신축 분양하는 A사업장도 마찬가지였다. 신탁사가 제시한 직접지급합의서에 서명날인하고 안심한 하청은 혼신의 힘을 다해 공기를 맞추려 노력했고, 신탁사로부터 직접 기성에 따른 공사비를 지급받았다. 시공사 눈치를 보고, 공사비 지급 지연 사례가 빈번한 여느 사업장과는 달랐다.

그러던 어느 날 분양이 실패해 미분양 상태가 됐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하청인 협력업체는 내심 불안했지만, 직불현장이고 신탁사가 직접 사업을 관리하는 현장이라 분양의 성패와 공사대금 지급과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신탁사에게 남은 기성을 청구했다.

"분양대금 없다"며 공사비 지급 거절
이번에는 달랐다. 신탁사 직원은 "미안하지만, 금융사에 지급할 분양대금이 들어오지 않았다"며 "미분양이 해소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하청은 황당했다. 공사를 마쳤으니 빨리 공사비를 받고 다른 현장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서울의 유명 신탁사가 분양이 잘 안 됐다고 얼마 되지도 않을 공사대금 지급을 거절하는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신탁사 담당자에게 계속 따져 묻자, 담당자는 원청이 날인한 관리형 토지신탁 계약서를 보여줬다. 담당자는 신탁계약서 특약의 '자금집행순서' 조항을 가리키며 "공사대금의 자금집행순서가 13순위인데 지금은 분양금이 안 들어와 앞 순위 자금도 지급할 여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하청은 관리형 토지신탁 계약서라는 걸 생전 처음 봤다. 심지어 자신이 서명한 직접지급합의서에도 신탁계약에 관한 언급은 없었다. 난생 처음 보는 계약서를 내밀며 기성고 지급을 거절하자 하청도 매우 억울했다. 아무리 그래도 어느 정도 자금력이 있을 신탁사인데, 돈이 없어 협력업체 기성도 해결 못해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신탁사는 요지부동이었다. 신탁사 직원은 "원청이 청구했어도 같은 이유로 거절했을 것"이라며 미안해했다. 하청이라고 특별히 우대할 이유는 없다는 거다. 결국 하청은 신탁사를 상대로 밀린 공사대금의 지급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1심은 "하청의 직접지급청구권이 신탁계약의 자금집행순서에 따라 제한될 수 있다"며 신탁사의 손을 들어줬다.
엇갈린 1·2심…대법 "자금집행순서 따라야"
항소심에서는 판결이 뒤집혔다. 항소심은 12가지 이유를 들어 신탁사에게 "하청의 밀린 공사대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대전고등법원 2023. 2. 8. 선고 2021나16964 판결). 하청에게 부동산 개발사업의 위험을 전가하는 것은 하도급대금의 직접지급청구권을 보장하는 법의 취지에 반한다고 봤다. 하청은 부동산 개발사업에서 발생한 이익을 분배받지 못한다. 완공 과정에서 이미 상당한 비용을 지출한 하청이 미분양 위험을 떠안고, 개발이익은 전적으로 원청이나 발주자에게 돌아가는 것은 부당하다는 거다.

그러자 신탁사도 대법원에 상고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신탁사는 사업장에서 별도로 계정을 만들어 자금을 관리하고 소정의 신탁보수만을 받는다. 미분양에 따른 공사대금까지 지급해야 한다면 신탁사의 고유계정에서 돈을 지급할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신탁계약을 체결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대법원은 2심과는 달리 신탁사의 손을 들어주며 사건을 마무리했다(대법원 2023. 6. 29. 선고 2023다221830 판결). 원청이 신탁사업 약정 등에 따른 자금집행순서에 따라 공사대금을 청구하기로 합의한 이상, 신탁사는 하청의 공사대금 청구를 자금집행순서 약정을 이유로 거절할 수 있다고 봤다.

대법원은 자금집행순서의 성격을 법률상 '정지조건'이라고 판시했다. 하청이 신탁사에게 공사대금을 청구하려면 신탁사가 자금집행순서에 따른 자금을 충분히 확보했음을 하청이 입증해야 한다는 뜻이다(다만, 신탁계약의 내용을 잘 알기 어려운 영세한 하청이 신탁사의 내부 자금 사정을 밝혀가면서까지 원활히 공사대금을 수령할 역량이 있을지는 상당히 의문이다).

하청은 해당 사업장의 미분양이 해소돼 분양대금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번 판결로 하청은 아무리 유명한 신탁사의 직불현장이라도 더 이상 안심할 수 없게 됐다. 하청을 보호하기 위한 하도급대금 직접지급제도의 보호막이 더욱 약해진 만큼, 하청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수지가 맞는 사업을 골라 개발사업의 리스크를 부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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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우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ㅣPF사업, 정비사업, 건설하도급 등 부동산 분쟁 전문가다. 성균관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원을 수료했다. 투자자산운용사와 국가공인 원가분석사 자격을 보유하고 있고 하도급법과 건설산업기본법을 연구해 업계 최초로 전자책을 출간했다. 대한변호사협회, 전문건설공제조합, 코트라(KOTRA) 및 각종 건설사와 학회에서 강의했다. 미국 일리노이주 변호사 자격을 가졌으며, 베트남 현지에 진출한 건설사에 파견근무한 경력이 있다. 이를 토대로 해외부동산투자 관련 분쟁에도 관여하고 있다. 2024년 대한변협 우수변호사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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