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얼굴도 없는 유령이 우리 주변을 떠돌고 있다. 이 유령은 어슬렁거리다가 소리 없이 다가와 우리 뒷덜미를 잡아챈다. 마치 먹잇감을 찾는 맹수같이 우리를 표적 삼는 이 유령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것은 바로 피로이다. 기분도 느낌도 아닌 이것, 피로는 유령처럼 형체가 분명치 않다. 피로는 항상 더 많은 성과를 내고, 더 오래 일하라고 다그치는 사회에서 폭증한다. 우리는 더도 덜도 아닌 서로에게 피로를 권하는 사회에서 산다. 이 유령은 두리번거리며 언제 어디에서나 삼키고 덮칠 대상을 고르는 중이다.
어머니를 보며 삶이 노동과 수고로 이루어진다는 걸 실감했다. 젊은 시절, 그러나 어머니는 단 한 번도 피로라는 말을 입에 올린 적이 없다. 그저 무겁고 힘든 노동에 순응했을 뿐이다. 누군가 “피로하다”라고 할 때 나는 그게 딱히 무슨 뜻인지를 알지 못했다. 피로가 무엇이지? 나는 어리둥절했다. 스무 살의 나는 밤을 새워 책을 읽고 글을 써도 정신은 맑고 몸은 거뜬했으니까. 누구에게나 젊음은 우유처럼 아름답고 갓 씻은 야채처럼 생생한 것이다. 밤을 새운 뒤 코피를 쏟아도 극기의 뿌듯함에 취했을 뿐 피로를 몰랐지만 나이가 드니 어쩔 수 없이 피로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일은 삶을 구성하고 떠받치며 이끌어 나가는 주요 성분이다. 일은 수고이고 근육의 힘을 쓰는 것이고, 제 존재를 증명하는 한 수단이다. 노동, 업무, 창작, 연애, 육아, 놀이 등등이 일의 범주에 든다. 우리의 현재는 일과 수고로 가득 차 있다. 일하는 자는 물질의 저항에서 자유롭지 않다. 누구나 알다시피 피로를 낳는 원인은 일과 수고이다. 오늘날 과로에 내몰린 노동자가 드물지 않게 생겨난다.
지난 4월 울산에서 한 택배 노동자가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그는 택배 터미널의 열악한 조건에서 날마다 열 시간씩 일하는 노동자였다. 그는 긴급 호송되어 간 병원에서 사망하는데, 직접적 사인은 협심증과 심부전이었다. 주당 60시간을 초과하는 노동과 나쁜 노동 조건이 그를 쓰러뜨린 것이다. 노동의 세기가 신체 한계를 넘어설 때 과로와 스트레스가 뇌출혈, 심근경색, 심장마비를 낳는다. 그런 나날의 노동에서 피로를 느낀다면 아마도 당신은 미약한 죽음을 겪는 중일 테다. 과로에 내몰리는 노동자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피로의 순교자가 되도록 강요당한다.
피로에 대한 자각이 산업화 시대 이전에는 없었다. 그때도 노동의 수고는 있었지만 그건 피로와 다른 무엇이다. 인간이 신과 신성에서 절연된 채 세속화로 떠밀려 온 현대에 와서 피로는 사회적 질병이 되었다. 피로의 징후 중 하나가 무기력이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무기력이 미래에 대한 피로라고 말한다.
당신은 천진한 얼굴로 피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당신을 위해 다시 한번 말하자. 피로는 살아 있는 동안 수고와 노동 사이에서 겪는 존재 사건이다. 그것은 노동의 강제에 놓인 누구에게나 닥치는 현상이다. 피로는 우리 안의 에너지가 고갈된 신체, 더 정확하게는 수고에서 파생되어 근육에 들러붙는 잉여 물질이다. 우리는 일에 신체 에너지와 건강이라는 가용 자산을 투여한다. 노동에 투여하는 이것은 유한 자산이다. 이 유한 자산이 바닥을 드러내면 신체는 마비와 수동성에 사로잡혀 결국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이른다.
피로는 생명이 품은 약동의 고갈이자 무기력이고, 사소해서 그 위험성을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존재 사건, 영혼을 덮치는 무거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피로는 오늘날 사회에 꽤 넓게 유포된 잠재적 죽음이다. 더 나아가 존재의 고갈에 이르는 자기 착취, 약동의 침식, 공들여 존재 죽이기라고 말할 수 있다. 피로가 자기에게서 멀어짐, 헛된 짓을 하고 있다는 선언, 당신 삶에서 의미 실현이 한없이 지체되고 있다는 유력한 징후라는 걸 알아야 한다.
피로는 조금씩 쪼개서 감당하는 작은 죽음이다. 과로사란 작은 죽음의 연쇄가 쌓여서 만든 재앙이다. 당신은 피로한가? 당신이 피로하다고 말하는 순간은 죽음이라는 경계에 다가간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당장 그 덫에서 빠져나와야 하지 않을까? 당신을 과로로 내모는 삶은 좋은 삶이 아닐 테다. 그 나쁜 방식을 멈출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과연 우리는 일과 휴식 사이에서 보다 안전한 삶의 균형을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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