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핵심기술 100GB 들고 이직…"방산 하청에선 이런일 빈번"

입력 2024-11-19 17:53   수정 2024-11-19 17:54

국내 중소기업 T사는 울산지방법원에서 기술 유출 혐의로 재판받고 있다. 독일 방산 기업 가블러와 국내 방산 대기업의 잠수함 부품 기술을 빼돌린 혐의를 받는다. 해군 핵심 전력인 장보고함Ⅰ·Ⅱ에 쓰인 이 기술 유출 사건은 외교 문제로도 비화할 가능성이 있다. 검찰 수사 전까지 T사에 일감을 준 해군과 해당 대기업은 기술 유출 사실을 몰랐던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가 방위산업 분야 ‘원청’ 격인 87개 기업의 관리에 집중하는 동안 하청 업체가 모인 ‘바닥 생태계’에서 기술과 인력을 빼가는 복마전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유출자는 훔친 기술 쉽게 되판다”
19일 수사당국과 방산업계에 따르면 T사는 2022년께 도산할 위기에 놓인 중소기업 K사의 임원을 꾀어내 100GB(기가바이트) 분량의 기밀을 빼냈다. 훔친 기술을 토대로 해군군수사령부, 국내 방산 대기업 등에 제품을 공급한 것으로 확인됐다. 건당 수십억원 규모로 총 수백억원대 매출을 올렸다.

기술을 빼앗긴 K사는 국내 방산 대기업 및 가블러와 일한 업체다. 유출 사실을 파악한 가블러가 T사에 기술 삭제 및 반환을 요구했으나 T사가 무시하면서 국제 분쟁으로 번질 조짐이다. 검찰은 T사가 거액을 받고 훔친 기술을 다른 국내 기업에 판매하려 한 정황도 확인했다. 검찰 관계자는 “개인 저장매체에 불법 보관하며 외부로 비밀을 누설해 죄질이 가볍지 않다”고 했다.

훔친 기술로 영업하고 해외에 판매하는 사례도 빈번하게 적발되고 있다. 경기남부경찰청 산업기술안보수사대는 지난 8월 K-2 흑표 전차의 화생방 양압장치 생산업체 S사 전 직원 등을 검찰에 송치했다. 이들은 A사로 이직하는 과정에서 기술을 빼돌려 중동 국가에 수출을 시도한 혐의를 받는다. 이 사건을 수사한 경찰 관계자는 “기술을 탈취한 이들이 죄책감 없이 헐값에 기술을 뿌리다시피 했다”고 말했다.
○정부는 원청만 관리, 하청은 방치
‘사람이 곧 기술’인 방산업계에서 인력을 활용해 기술을 빼내는 사례는 이뿐이 아니다. 인천의 한 중소기업 A사는 자체 개발한 해상인명 구조 장비를 투자 기업인 W사에 빼앗겼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A사 대표 B씨는 “W사로부터 투자를 받고, 협업하던 도중 이직한 직원이 복제품을 판매해 수십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도산 위기에 몰린 B씨는 “기껏 개발한 제품이 돈이 벌린다는 소문이 돌면 곧바로 규모가 큰 경쟁사가 직원을 영입해 기술을 빼가는 게 현실”이라고 하소연했다.

80여 개 방산 기업뿐 아니라 수천 개의 기업이 모인 하부 생태계가 관리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입찰 시 치명상을 입는 보안 감점 제도가 두려운 원청 방산 기업만 기술 유출에 신경을 쓰고 수천 개 하도급사와 재하청, 일반상용물자 제조기업 등에선 인력과 기술 탈취가 다반사인 게 업계 현실이다.

이왕휘 아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전문 인력이 부족한 방위사업청이 갈수록 규모가 커지는 방위산업을 관리하기 어려운 실정”이라며 “미국처럼 정부 내 유관기관이 힘을 모아 방산 전반의 보안관리 체계를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철오/정희원 기자 cheo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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