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에 대한 한국 사회의 정서는 엇갈립니다. 좋아하는 사람 반, 욕하는 사람 반 정도라고 할까. 하지만 국내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변호사를 나쁘게 그린 작품은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처음에 악인처럼 등장해도 종국에는 정의의 편에 서는 서사가 만들어집니다.
“문화는 대중의 욕망을 투영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명제에 비춰보면 한국인들의 변호사에 대한 코드는 여전히 ‘키다리 아저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능력을 기반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그런 존재 말입니다. 물론 일관되게 정의롭게 그려지는 것 자체가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간극을 보여준다는 반론도 일리 있습니다.
궁금해졌습니다. 한국에서 변호사의 기원 혹은 원형은 무엇이길래 이런 코드가 자리 잡았을까. 현대사에서 존경받는 변호사들 이전에는 어떤 변호사들이 있었을까.
한국의 변호사 제도는 1905년 대한제국 변호사법이 공포되면서 시작됐습니다. 1907년 첫 변호사 시험이 치러졌습니다.
1호 변호사는 허헌이었습니다. 한 논문에는 “1908년 허헌 변호사가 시장의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판사와 법적 다툼을 벌인 일화는 바람직한 변호사의 표상을 제시한다”고 서술돼 있습니다. 대한민국 변호사의 원형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변호사들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게 하는 표현입니다.
허헌 변호사는 일제강점기 민족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만해 한용운 선생과의 일화도 갖고 있습니다.
1930년 만해와 허헌은 항일 민중대회 모의 혐의로 유치장에 함께 갇혔습니다. 만해는 변론도 받지 않고 보석도 거부하는 강경파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상남자 스타일이었습니다.
법률가인 허헌은 달랐습니다. 유치장으로 법전을 반입해 뒤적이며 “우리가 한 일은 경범죄밖에 안 되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만해는 못마땅했습니다. 유치장에서 나온 후 만해는 이인이라는 다른 변호사와 상추쌈에 점심을 먹으며 말했습니다. “독립을 위해 싸우는데 법전이나 뒤지고 죄의 경중을 따지는 것에 화가 치밀었다. 목침으로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상남자가 보기엔 샌님 같은 짓이 답답했던 모양입니다.
이를 들은 이인 변호사는 순간 웃음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내로라하는 독립운동가와 유명한 민족변호사가 감방에서 틱틱거리고 있는 장면이 그를 빵 터지게 했던 것이지요. 순간 이인의 입에서 상추가 튀어나와 만해의 얼굴에 도배되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엄중한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가들이 한바탕 웃은 해프닝이었습니다.
이 일화에 등장한 허헌, 이인은 가인 김병로와 함께 일제강점기 3인의 민족변호사로 불립니다. 허헌은 3·1운동으로 투옥된 민족대표들을 변호했고 이인은 6·10만세운동, 의열단, 소작쟁의 등의 변론을 맡았습니다.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 역시 독립지사 관련 사건을 무료로 변론했습니다. 이들은 해방 후 각기 다른 길을 갔지만 오랜 기간 후배 변호사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한경비즈니스는 올해도 최고의 활약을 펼친 로펌과 변호사를 선정했습니다. 이들과 함께 지면에 2017년 이후 베스트 로이어 명단도 함께 실었습니다. 언제든 다시 베스트 로이어 명단에 오를 후보들이기도 합니다.
법률 수요에 비해 변호사는 부족하고 전관예우가 특효처방이었던 시절 변호사업은 법 기술과 네트워크가 핵심 역량이었습니다.
하지만 경쟁이 치열해진 현재의 변호사 시장에서는 전문 지식과 서비스, 그리고 사회적 인정까지 받아야 합니다. 신뢰 산업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면에서 각 로펌들이 사회적 현안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 해결을 위해 법률적, 행정적 지식을 동원하는 것은 바람직해 보입니다.
한 로펌 대표변호사의 인터뷰 중 “공익감수성”이란 표현에 한동안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변호사들은 전문 법지식을 사회에 환원하여 사회 모든 구성원이 법제도의 혜택을 제대로, 충분히 누릴 수 있는 따듯한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를 통해 변호사가 사회에서 받은 혜택을 돌려줘야 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이런 인식의 확산이 한국의 로펌과 변호사들이 그들의 기원과 원형에 한발 더 다가가는 계기가 되길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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