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오페라 아리아는 때로 우리에게 실망을 안기기도 한다. 원인은 대개 가사 내용 때문이다. 곡조가 퍽 아름다워 노랫말 또한 그런 줄 알았는데 사실은 시시한 경우가 종종 있다. 헨델의 아리아 ‘그리운 나무 그늘’이 그렇다.
“내가 사랑하는 나무 플라타너스여, 아름답고 풍성한 나뭇잎이여. 가혹한 자연의 운명에도 너는 언제나 빛나지. 천둥과 번개, 그리고 폭풍도 너의 평안을 위협하지 못한다네. 저 사나운 갈바람마저도 너는 능히 이겨내지. 여기선 언제나 온화하고 유쾌한 기분이 든다네. 이런 나무 그늘은 결코 없으리.”
이 멋진 아리아를 듣노라면, 그리웠던 나무 그늘 밑에서 옛 애인을 애틋하게 회상하거나 인생의 희로애락에 대해 돌이켜 보거나 아니면 죽음의 심오함에 대해 고뇌해야 할 것만 같다. 그러나 실제는 ‘옴브라 마이 푸(Ombra Mai Fu)’. 직역하면 “이런 그늘은 결코 없다”. 그저 나무를 칭송하는 노래다.
그런데 아쉬워할 일은 아니다. 바로크 시대의 아리아들은 각인 효과를 위해서라도 대개 악곡은 단순하되 대신 가수의 기교를 높이 쳤다. 가사의 내용은 그다지 중요한 덕목이 아니었던 것.
‘라르고(Largo)’라는 이름은 이 노래의 별칭이다. 악상기호 라르고는 ‘매우 느리게’. 즉 라르고풍의 전형적인 아리아가 ‘그리운 나무 그늘’이란 것이다. 차이콥스키의 현악 4중주 1번 2악장을 안단테 칸타빌레(느리게 노래하듯이), 알비노니의 현과 오르간을 위한 아다지오를 아다지오(천천히), 보로딘의 현악 4중주 2번 3악장을 녹턴(야상곡)이라고 약칭하는 것과 같다.
주인공은 세르세(B.C.519~465). 크세르크세스(Xerxes)라고도 불리는 역사상 실재 인물로 페르시아 왕이지만 내용은 허구다. 세르세는 궁정 뜰에서 우연히 만난 제사장의 딸 로밀다를 보고 한눈에 반한다. 그러나 그녀는 세르세의 동생 아르사메네와 사랑하는 사이다. 운명은 얄궂기도 한 게 로밀다의 동생 아탈란타도 아르사메네를 짝사랑하고 있다. 또 한 사람 아마스트레. 세르세 왕과 정혼한 상태인 타타르 왕국의 공주다. 이 복잡다단한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은 왕의 너그러운 양보로 로밀다와 아르사메네가 결혼한다는 이야기다.
헨델이 조지 1세 영국 왕의 환심을 사고자 53세 완숙기인 1738년 만든 오페라다. 그러나 흥행에는 실패했다. 이유는 바로 과도한 욕심. 희극적 요소와 비극적 분위기를 너무 얼기설기 엮어서 혼란스러웠고, 관객을 질리게 만들었다.
1980년대 이후 ‘세르세’가 종종 상연되긴 하지만, 여전히 매우 드물며 유독 이 아리아만 빛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랑스의 앨토 가수 나탈리 스튀츠망(59)이 단연 잘 부른다.
메조 소프라노는 많지만 진성 앨토는 매우 드문 현실에서 스튀츠망은 실로 별과 같은 존재다. 마리안 앤더슨(1897~1993)과 캐슬린 페리어(1912~1953) 이후 우뚝한 앨토가 없던 차 스튀츠망의 존재감이 든든하다. ‘앨토(Alto)’라는 말은 라틴어 알투스(Altus)가 어원이다. ‘깊다/고결하다/숭고하다’의 뜻을 품고 있다. 스튀츠망의 노래는 이 앨토의 본령에 다가간 듯한 느낌을 받는다.
독일의 한 평론가는 그녀의 소리에 대해 ‘비터쥐스’라는 표현을 했다. ‘달콤 쌉싸래하다’ 혹은 ‘고통스럽도록 아름답다’는 의미다. 스튀츠망이 대중에게 특히 어필했던 건, 2009년 스스로 결성한 ‘오르페오 55’라는 바로크 전문 실내악단과의 협연일 터. 그녀는 지휘하며 노래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오르페오 55는 그러나 아쉽게도 2019년 해체된다. 지휘 일념으로 스탠스를 굳히기로 한 그녀의 결심 때문이다. 현재는 노르웨이 크리스티안산드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일하고 있다.
강성곤 음악 칼럼니스트·전 KBS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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