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 수 26명, 자본금 6억5000만 원. 하나금융그룹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한국투자금융(하나은행 전신)은 1971년 6월 그렇게 조촐하게 출발했다. 당시 기업들이 돈을 구하지 못해 사금융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이 우리 경제의 취약점으로 꼽혔는데, 기업에 단기 여신을 제공하는 목적으로 설립된 단기 금융사가 바로 한국투자금융이었다.
하나금융 관계자는 “한국투자금융은 한국 최초의 순수 민간 금융 중개기관”이라며 “창립 초기부터 적정한 수익성과 유동성을 함께 갖춘 새로운 단기 금융 수단을 제공해 상당한 규모의 시중자금을 기업체에 중개해주는 데 성공했다”고 설명했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금융의 증권화·국제화 현상이 가시화되자, 한국투자금융은 국내 증권 산업이 크게 발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런 전망 아래 1980년 1월 태평증권주식회사의 발행주식 51%를 인수하며 증권업에도 뛰어들었다.
1987년 6월에는 국내 자본시장의 급격한 성장과 국제화 추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한국투자경제연구소를 한국투자금융 내 부설기관으로 설립하기도 했다. 하나금융 관계자는 “이로써 증권 회사, 경제연구소, 투자자문 회사로 이어지는 종합 금융 서비스 제공이 가능해졌다”고 했다.
잇딴 M&A 기회로 빠르게 성장
현재 대중에게 친숙한 ‘하나은행’이라는 이름으로 금융권에 등장한 것은 최초 설립으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1991년의 일이다. 이때만 해도 우리나라 은행업의 지도는 ‘조·상·제·한·서(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은행)’를 주축으로 형성돼 있었다. 한국투자금융의 자산 1조5000억 원으로 설립된 하나은행은 과거와 비교하면 외형을 크게 확장한 상태였지만, 당시 금융권을 주름잡던 메이저 은행과 비교하면 존재감이 미미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성장세는 가팔랐다. 은행 전환 5년 만인 1996년 외환 성적 100억 달러를 달성한 데 이어 1997년 4월 총수신고 15조 원을 돌파하는 성과를 냈다.
무엇보다도 인수·합병(M&A)으로 덩치를 키운 하나은행의 역사가 이 무렵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1998년 6월 이뤄진 충청은행 인수가 그 신호탄이었다. 외환위기로 은행들마저 휘청이던 시기, 정부는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 8%를 충족하지 않는 은행은 퇴출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지방은행이었던 충청은행도 그 대상에 포함됐다. 하나은행이 지점 수와 덩치가 자사보다 큰 충청은행을 흡수 합병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하나은행은 자산부채 인수 방식(P&A)을 통해 충청은행을 인수하고, 그해 10월 충청사업본부를 정식으로 출범했다. 충청 지역 사업본부의 대내외 공식 명칭은 ‘충청하나은행’이었다. 충청하나은행의 출범을 통해 충청 지역에서 확고한 영업 기반까지 마련했다.
이어 1999년에는 보람은행, 2002년에는 서울은행과 차례로 합병하며 빠르게 외형을 확장했다. 격변의 시기를 지나며 ‘조·상·제·한·서’의 시대는 저물고 하나은행이 새로운 5대 은행으로 떠오른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하나은행(H)과 서울은행(S), 보람은행(B), 충청은행(C)의 이니셜을 각각 따온 ‘한국의 HSBC’라는 말이 농담처럼 돌기도 했다. 위트를 섞은 표현이긴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몇 년 전인 1997년만 하더라도 하나은행의 지향점이 ‘작지만 좋은 은행’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괄목할 변화였다.
금융그룹 체제 본격화
2000년대 중반에 들어서며 또 한 번의 큰 변화가 생긴다. 바로 금융그룹 체제다. 당시 금융권에서는 대형 은행이 은행업에만 집중하는 것보다는 비은행 자회사와 시너지를 내는 것이 미래 생존에 유리할 것이라는 분위기가 대세로 떠올랐다. 특히 대형 금융그룹 체제에서 은행, 증권, 카드 등 금융 서비스를 종합적으로 진두지휘하면 영업 경쟁에서 고점을 차지하기 유리하고, 금융 계열사 간 시너지를 내기도 수월하다는 게 중론이었다.
하나은행도 M&A로 존재감을 키워온 데서 한발 더 나아가, 금융권의 강자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승부수가 필요한 시기였다. 당시 하나은행은 산하에 알리안츠그룹과 공동출자한 하나생명보험, 하나알리안츠투신운용 등 몇몇 자회사를 둔 상태에서 대한투자증권(현 하나증권)의 인수를 타진하던 상황이었다. 결국 2005년 하나은행은 대한투자증권(현 하나증권)을 인수하고, 같은해 하나금융지주를 공식 출범하기에 이른다. 지주사 출범과 함께 2009년까지 그룹 내 자산총액 190조 원, 시가총액 20조 원을 달성해 세계 100대 금융그룹으로 도약하겠다는 포부도 세웠다.
은행업 전환 이후 14년에 걸쳐 시중은행 2곳, 지방은행 1곳, 증권사 1곳을 인수한 하나금융은 지주사 출범 이후에도 계열사를 적극적으로 늘려 갔다. 2007년 하나USB자산운용(현 하나자산운용)을 설립한 데 이어, 2008년 하나HSBC생명보험(현 하나생명) 출범, 2010년 다올신탁(현 하나자산신탁)과 다올자산운용(현 하나대체투자자산운용)의 자회사 편입까지 완료하며 금융그룹으로서의 골격을 완성해 나갔다.
격동의 2010년대, 외환은행 인수까지
2010년대 들어 하나금융의 위상을 지금과 같은 위치로 올려놓는 데 큰 역할을 한 ‘빅딜’이 하나 성사된다. 바로 외환은행 인수다. 하나금융은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로부터 외환은행 보유 주식 3억2094만여 주(지분율 51.02%)를 주당 1만1900원(3조9156억 원)에 사들이고 2012년 자회사로 편입한다. 이 M&A는 하나금융이 명실상부한 금융지주 4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사실 외환은행 인수 전 하나금융의 총자산은 KB금융지주, 우리금융지주, 신한금융지주에 비해 크게 뒤지는 상황이었다. 선두 금융지주들이 300조 원을 넘는 총자산을 갖춘 데 비해, 하나금융의 총자산은 200조 원대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러다 M&A를 기점으로 외환은행의 총자산이 더해지며 그 격차를 순식간에 따라잡을 수 있게 된 것. 공정거래위원회도 하나금융의 외환은행 인수 기업결합심사 결과에서 “자산 기준 시중은행 4~5위였던 하나금융과 외환은행이 결합해 3위가 됨으로써 KB금융, 우리금융, 신한금융과 더욱 활발하게 경쟁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핵심 계열사인 은행 본업의 경쟁력을 강화한 것도 외환은행 인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득이다. 당초 하나은행이 갖고 있던 강점은 리테일 영업이었다. 고액자산가를 위한 프라이빗뱅킹(PB) 서비스를 1995년 도입하는 등 자산관리 영역에서 남다른 역량을 키웠다. 반대로 보완이 절실했던 영역은 기업금융, 무역금융이었다. 외환과 기업금융에 강점을 보였던 외환은행과의 시너지 효과가 클 수밖에 없었다.
김승유 당시 하나금융 회장이 “외환은행을 인수하는 것은 하나금융이 새로운 지도를 그리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라며 “한국도 국제 금융 시장에 적극 진출해야 할 시기다. 외환은행 직원들의 업무 경험이 우수해, 하나금융이 한국을 대표하는 금융그룹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통합 시너지는 길지 않은 시일 내에 나타났다. 하나은행과 외환은행의 통합 이후 은행의 상반기 당기순이익은 7990억 원으로 통합 직전 해의 같은 기간보다 7.6% 증가했다. 특별한 일회성 이익 요인 없이 거둔 성과인 만큼, 통합은행 출범과 전산통합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서 생긴 시너지 효과라는 게 은행 측 분석이었다.
한때 지점 수 2개의 군소은행이었던 초창기 규모가 무색하게도, 하나금융은 이제 총자산 802조 원대의 대형 금융그룹으로 성장했다. 하나금융이 그리는 넥스트 스텝은 무엇일까. 하나금융 관계자는 “1971년 창립 이래 변화무쌍한 전략과 적극적인 사업모델 전환으로 시장 변화에 따른 무수한 경영 위기들을 극복해 국내 선도 금융그룹으로 자리매김했다”며 “단순 성장 중심이 아닌 가치 중심 도약을 추구해 고객, 주주, 사회와 함께 대한민국을 넘어 아시아 넘버원 금융그룹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초원 기자 ccw@hankyung.com
-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