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쟁에 박세리까지 끌어들이다니…"골프는 죄가 없다" [이슈+]

입력 2024-11-24 21:19   수정 2024-11-24 21:21


"골프의 단점은 너무 재밌다는 것이다." 골프에 각별한 애정이 드러나는 이 말, 모순적이게도 "공직 기강을 세우겠다"며 '골프 금지령'을 내린 고(故)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말입니다. 우리나라에 최초의 골프장(1921년·효창원 골프장)이 생긴 지 어언 100년입니다. 골프가 대중 스포츠로 자리 잡기 전까지는 '부르주아 스포츠'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YS도 이런 점을 의식해 금지령을 내렸을 겁니다.

하지만 골프 유입 후 1세기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골프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국내 골프 인구는 500만명을 넘어섰고, 더 이상 부자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지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그런데도 골프는 예부터 지금까지 쭉 많은 정치인의 발목을 잡아 오고 있습니다. 왜 정치인들의 골프 논란은 끊이질 않는 걸까요. 골프업계와 정치권 관계자들은 "골프엔 죄가 없다"고 입을 모읍니다.
尹 대국민 사과 이틀 후 골프…박세리 끌어들인 與


가장 최근 골프로 진땀을 빼고 있는 건 윤석열 대통령입니다. 윤 대통령은 지난 7일 배우자 김건희 여사 문제 등으로 국민들 앞에 고개 숙여 사과했는데요. 이틀 뒤 골프장 잔디를 밟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시의 부적절성을 지적하고 나선 민주당은 "제정신이 박힌 대통령이라면 골프장 대신 민생 현장을 찾아야 한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는데요. 하지만 여권은 '골프 영웅' 박세리까지 소환하며 윤 대통령의 골프 활동은 문제 될 게 없다고 반박했습니다.

정성국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20일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대통령은 골프 치면 안 되나. 1997년 박세리 선수가 있지 않았나. IMF 외환위기 시절, 박찬호의 메이저리그와 박세리의 골프는 많이 회자됐던 내용"이라며 "거의 30년 전인데도 박세리 선수가 그런 큰 성과를 이뤘을 때 국민들은 박수를 쳤다"고 감쌌습니다.


대통령실은 '골프광'으로 알려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의 '골프 외교'를 대비한 연습의 취지도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골프 외교도 있다 할 정도로, 만약 트럼프 당선자가 우리 대통령에 라운딩하자 했을 때 골프를 전혀 못치는데 라운딩에 응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습니다.

홍 수석은 그러면서 "역대 어느 정부에서도 골프 문제가 이렇게 비난의 대상, 정쟁의 대상이 된 적 없다"고 토로했는데요. 이와 달리 골프는 오랜 시간 정쟁의 중심에 서 왔습니다.
"역대 정부서 골프 정쟁 된 적 없다"?
대표적인 사건이 2006년 참여정부 시절 이해찬 총리의 '3·1절 골프' 파문입니다. 3·1절에 골프를 친 자체만으로도 문제였지만, 당시 철도파업으로 비상인 상황에서 총리가 골프를 친 것이라 더욱 논란이 됐었습니다.

당시 국민의힘 전신인 한나라당은 "국무보다 골프를 좋아하는 이 총리는 골프를 계속 치도록 해드리는 것이 국민 된 도리"라면서 사퇴를 거세게 압박했고, 결국 이 총리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하고 대국민 사과까지 진행한 뒤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2008년 이명박 정부로 정권이 교체된 해 8월, 이때는 허태열 한나라당 최고위원 등 당시 여권 인사들이 '광복절 연휴'에 일본으로 골프 여행을 다녀와 구설에 올랐습니다. 또 같은 기간 정세균 민주당 대표도 때마침 국내에서 골프를 쳐서 빈축을 샀습니다.

2009년 1월에는 박영선 민주당 의원을 비롯한 민주당 의원 9명이 임시국회 회기 중 부부 동반으로 태국에 골프 여행을 갔다가 물의를 빚었습니다. 특히 박 의원은 약 10년 뒤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국정원이 미행하지 않았다면 민주당 의원들이 여행 가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라고 반문하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비교적 최근인 2023년에도 홍준표 대구시장이 '수해 골프' 논란을 빚어 곤경에 처했습니다. 홍 시장은 그해 7월 15일, 충청과 영남 지역에 집중호우가 쏟아지던 당시 대구의 한 골프장에서 골프를 쳤는데요. 홍 시장은 "대구에는 수해 피해가 없었다"며 떳떳하다는 입장을 고수하다가, 결국 당 징계를 비롯한 전방위 압박에 고개를 90도로 숙였습니다.

이처럼 골프와 정치인의 질긴 악연. 골프채를 잡기 전 딱 한 번만 고민하면 끊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 한 캐디는 "지금 골프 치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세간의 시선을 전혀 신경 안 쓰고 라운딩을 나오는 정치인들이 이따금 있다"고 전했습니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는 일부 정치인들이 문제이지, 골프엔 죄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홍민성 한경닷컴 기자 msho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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