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사기꾼이 있다. 1950년대 박인수는 해군 헌병 대위를 사칭하고 70명 넘는 여성과 교제하다가 혼인빙자간음죄로 구속돼 나라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다.
장영자는 1982년 대통령과 친척 관계라며 기업들을 속여 총 7000억원 규모의 피해를 입혔다. 최근엔 재벌 3세를 사칭해 수십억원대 투자 사기를 벌인 전청조도 있다. 우리나라 범죄 네 건 중 한 건을 차지하는 사기. 사람들은 왜 반복되는 사기에 계속해서 속을까.
쑨중싱 대만대 사회학과 명예교수의 <신뢰는 어떻게 사기가 되는가>는 대만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교양 강의 중 하나였던 ‘사기의 사회학’을 바탕으로 쓰였다. 사기를 치는 사람과 속아 넘어가는 사람, 이들을 둘러싼 사회를 사회학, 심리학, 철학, 역사 등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했다.
사기는 거짓말과 다르다. 사기는 속이는 행위 자체로 정의되지 않고 그 행동에 담긴 의도와 상황, 결과 등을 포함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소설로 허구 세계를 창조하는 작가와 손기술로 관객의 눈을 즐겁게 하는 마술사를 사기꾼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다.
사기당하는 사람이 끝까지 속아도 사기라고 하기 어렵다. 속은 사람이 ‘진짜 현실’로 돌아와 자신이 ‘사기 현실’에 처해 있었다는 걸 깨달을 때야 사기 사건이 성립한다. 거짓말로 결과적으로 피해를 본 사람이 없어도 사기라고 하기 모호하다.
사기는 믿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사람들은 믿기 때문에 사기를 당한다. 사기꾼을 믿게 하는 요소는 다양하다. 외모가 뛰어나거나 매력을 갖춘 이는 일단 경계심과 의심을 거두게 한다.
상업광고에서 미남 미녀를 모델로 내세우는 이유도 비슷하다. 혈연관계거나 가까운 친구, 사랑하는 사람, 같은 집안 출신 앞에서도 판단이 흐려진다. 학력과 직업, 경력, 부 등 화려한 배경도 마찬가지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이라고 해서 사기꾼이 되지 말란 법은 없다.
연구에 따르면 사기 피해자에겐 몇 가지 공통적인 특성이 나타난다. 사회적 교류가 적으면 사기당할 위험이 높다. 속임수의 전형적인 특징이나 사기극이 돌아가는 방식을 늦게 접할 가능성이 커서다. 자신을 너무 믿어도 사기를 당할 수 있다. 자기는 똑똑하고 아는 게 많아서 절대 사기당할 리 없다고 자신만만한 사람이 오히려 더 쉽게 속는다. 어떤 목표에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지만 이를 이루기 어려운 상황일 때도 사기에 쉽게 흔들릴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을 상대로도 사기를 친다. 이른바 자기기만이다. 어느 정도 긍정적인 착각은 자존감을 높이고 삶에 활력을 줄 수 있지만 적절한 수준을 넘어섰을 때 문제가 된다.
정치인이 유권자를 상대로 하는 거짓말도 일종의 사기다. 저자는 민주주의가 발달할수록 정치인이 주체가 되는 사기가 잦아진다고 설명한다. 유권자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정치인은 자신의 단점을 숨기기 위해 왜곡과 누락, 과장 등 갖은 유혹에 빠지기 쉽다.
책장을 넘길수록 대학 교양 강좌 강의실에 앉아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저자는 “믿음에서부터 사기가 발생한다”고 말하면서도 “아무도 믿지 않는다면 사회 자체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며 고민한다. 명확히 답을 내리기보단 함께 생각해보자고 질문을 던지는 식이다. 대중교양서와 학술서 사이에서 묘하게 줄을 타는 책이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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