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체적 난국" 중국의 '조롱' 두 달 만에…충격 휩싸인 유럽 [김리안의 에네르기파WAR]

입력 2024-11-27 12:21   수정 2024-11-27 14:20

이 기사는 국내 최대 해외 투자정보 플랫폼 한경 글로벌마켓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배터리 설계도, 공정도, 장비도 모두 잘못됐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생산 규모를 확대할 수 있겠는가?"

세계 최대 배터리 제조업체인 중국 CATL의 로빈 정 최고경영자(CEO·사진)는 유럽 배터리 제조사들을 '총체적 난국'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유럽 업체들이 왜 우수한 품질의 배터리를 만들지 못하고 있는지에 대한 분석이었다. 로빈 정 CEO는 "유럽은 거의 모든 실수를 한꺼번에 저지르고 있다"고 일갈했다.

로빈 정 CEO는 CATL을 세계 최대 배터리 제조사로 만든 공로를 인정받아 '중국의 배터리 왕'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의 비판과 조롱은 '유럽산 배터리의 희망'으로 꼽히던 스웨덴 기업 노스볼트가 파산을 신청하기 두 달 전의 일이었다.
7년만에 좌초한 '유럽의 야심작' 노스볼트
2017년 유럽연합(EU)은 아시아(특히 중국) 의존도를 낮추고 역내 배터리 공급망을 구축하기 위해 의기투합했다. EU는 60억 유로 이상의 예산을 배터리 프로젝트와 연구개발(R&D) 등에 투자했다. 그 결과 글로벌 배터리 시장에서 유럽산 점유율을 3%에서 지난해 17%로 늘리는 데 성공했다. 작년 유럽 배터리 업계의 연간 매출은 810억 유로에 달했다.

노스볼트는 그 희망의 중심에 있었다. 세계 최대 전기차 회사인 테슬라의 임원 출신이 세웠다는 상징성에 더해 골드만삭스, 폭스바겐 등 글로벌 투자자들이 확실한 우군이 돼 줬기 때문이다. BMW, 볼보, 포르쉐 같은 유수의 유럽 자동차 산업 고객사들까지 확보한 노스볼트는 승승장구하는 듯 했다.


하지만 최근 노스볼트는 5억8000만 달러 이상의 부채를 지고, 3000만 달러밖에 남지 않은 현금을 모두 소진한 뒤 파산 신청을 했다. 노스볼트의 CEO였던 피터 칼손(사진)은 "고객사에 배터리 셀을 전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동안에도 회사를 계속 확장한 것에 대해 후회한다"고 말했다. 무리한 확장이 화를 불렀다는 반성이었다.

폭스바겐의 트럭 사업부 스카니아는 노스볼트의 최대 고객사였지만, 배터리를 제때 납품받지 못해 전기 트럭 생산이 지연됐다. BMW는 노스볼트가 공급한 배터리의 품질 문제로 20억 유로 규모의 주문을 취소하기도 했다. 노스볼트의 파산은 배터리 모듈 및 팩 조립 시설(폴란드), 재활용 시설(노르웨이), 배터리 셀 제조 예정지(독일) 등 유럽 전역에 파장을 미칠 것이란 전망이다.

블룸버그통신은 "노스볼트의 파산은 경쟁이 더욱 치열하고 가혹해지는 산업에서는 화려한 지원 사격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전했다. 블룸버그의 크리스 브라이언트 칼럼니스트는 "노스볼트의 붕괴는 유럽이 자본이나 야망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경험과 실행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다른 유럽 배터리 제조사들도 위태롭다.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에 노스볼트 파산 사태까지 겹치면서 자금 시장이 경색되고 있어서다. 폭스바겐의 배터리 사업부인 파워코는 독일 잘츠기터 공장에서 계획된 두 개의 생산 라인 중 하나만 건설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프랑스 배터리 스타트업 베르코어는 최근 덩케르크에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13억 유로의 신규 자금 조달을 겨우 완료했다고 밝혔다.
자금 경색 우려에"그냥 중국 기술 이전 받자"
베르코어의 브누라 르마냥 CEO는 "설계, 장비 등을 새로 점검하는 등 (자금 조달을 위한) 추가 절차가 깐깐해졌다"고 말했다. 프랑스에서는 스텔란티스, 메르세데스벤츠, 토탈에너지가 지원하는 배터리 기업 ACC가 지난해 배터리 생산을 시작했다. 그러나 올해 ACC는 독일과 이탈리아에 공장을 추가 확장하려던 계획을 보류했다.

유럽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노스볼트 여파로 인해 다시 아시아 공급업체로 눈을 돌리고 있다. 포르쉐는 당초 내년 출시 예정인 포르쉐 718의 배터리를 노스볼트에서 공급받기로 했었으나, 이번 파산으로 대체 공급업체를 찾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아시아 기업들이 유럽 시장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경쟁을 다시금 벌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은 각각 폴란드와 헝가리에 공장을 두고 있다. 이미 독일 공장을 보유한 CATL은 내년부터 헝가리에서도 생산을 시작할 예정이다. 그러나 UBS의 팀 부시 배터리 애널리스트는 "유럽에서 한국 기업들은 확장을 멈췄고 중국 기업들은 건설을 중단했다"고 일축했다. 이로 인해 아시아 제조업체들이 2030년까지 배터리의 90%를 유럽 현지에서 생산하도록 만들겠다는 EU 당국의 목표는 달성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EU 당국은 내달 배터리 개발을 위한 10억 유로 규모 보조금을 신청받을 때 중국 기업에 ‘유럽에 공장을 설립하고 기술 노하우를 공유하도록 한다’는 새로운 조건을 도입할 예정이다. EU 보조금을 대가로 중국 회사가 유럽 기업에 지식재산권(IP)을 이전하도록 강제한다는 계획이다.

르노의 루카 드 메오 CEO는 "중국 기업들의 배터리 공급망 지배력과 대규모 제조 역량, 전문성을 벤치마킹하지 않고는 그들과 경쟁할 수 없다"고 말했다. 유럽 배터리 스타트업들이 아시아 업체들의 기술 노하우를 흡수할 때까지 협력(의존)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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