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다. ‘더 젊어 보입니다’,‘살이 많이 빠졌습니다’ 등 수없이 많다. 하지만 모두 하얀 거짓말(white lie)로 서로 기분을 좋게 하고, 조직의 활성화를 가져오며, 신뢰를 다지는 일을 한다. 이런 거짓말이 친밀감을 돋우고 신뢰감을 형성하다니 인간의 심리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모두 지켜야 할 선을 넘지는 않는다. 지켜야 할 선을 넘는 거짓말은 범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선’을 넘지 못하도록 심리적 방어기제가 작용하여 “죄책감은 우리를 되갚는 이타주의로, 비참함은 불행을 줄여서 우리 삶을 더 낫게 하려는 노력으로, 웃음은 삶의 논리적 불합리함을 이해하는 쪽으로 나아가도록 동기 부여를 한다.” 하지만 그 선을 구분하지 못하고 들락날락하는 사람은 ‘병’에 걸린 사람이거나 또 다른 ‘꿍꿍이’가 있는 사람이다.
미국 45대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재직 첫해 동안 2140가지의 거짓 혹은 허위 주장을 했으며 이는 하루 평균 5.9개인 셈이라고 워싱턴포스트지가 추산했다. 미국 대통령도 이러할 즈음인데 우리의 정치 현실을 고려하면 거짓말 혹은 허위 주장이 거의 일상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랜드연구소는 미국 공적 생활에서 ‘사실과 분석의 역할이 줄어드는’ 현상으로 ‘탈진실의 시대(post-truth)’라 정의하고 ‘사실의 진위와 상관없이 신념이나 감정이 여론 형성을 주도한다고 말한다. 우리나라도 대형 사건에는 어김없이 사실과 진실에 기반한 거대 담론이 아니라 가짜 뉴스와 감성으로 논의의 핵심을 결정한 사례가 수두룩하다. 한·미 FTA 논란, 광우병 괴담, 천안함 폭침, 제주도 해군기지 반대, 세월호 사건, 사드 반대 등은 여전히 논란 와중에 있다. 이런 사건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모두 같은 진영에서 문제를 제기하였고 사태에 불을 지른 결정적 계기가 ‘감성’의 자극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기는 문구는 광우병으로 ‘뇌가 구멍이 숭숭 뚫린다’라는 말과 ‘사드 전자파가 불임과 암을 유발하고 전자파로 참외를 먹지 못한다’라는 괴담이었다. 모두 공포감을 조성하였고 대단히 성공하였다.
영국 기자 마이클 브린은 오죽했으면 이런 현상을 “한국에서는 어떤 쟁점에 대한 대중의 정서가 특정한 임계질량에 이르면… 모든 의사결정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야수로 변모한다. 한국인들은 이 야수를 ‘민심’이라고 부른다”라고 꼬집었다. 어떤 분은 이 야수를 ‘집단지성’이라고 부르며 아주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한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에서 지금의 휴머니즘은 “지식=경험*감수성”의 기반 위에 존재한다고 정의하였다. 경험과 감수성은 모두 개인의 주관적 영역이다. 이렇게 지식이 변한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인터넷의 영향이다. 인터넷은 누구나 훌륭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가질 수 있다. 자기의 경험과 감수성을 글로 표현하거나 사진과 동영상으로 게시하면 거기에 ‘좋아요’라는 공감과 ‘댓글’이라는 의견으로 콘텐츠의 무게를 더한다. SNS의 콘텐츠 가치는 인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심오한 이론이나 논리가 아니라 공감과 댓글의 많음이 결정한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설득으로 집권할 수밖에 없다. 설득의 전쟁에서 가장 빛나는 보도(寶刀)는 프레임으로 먼저 상대방에게 낙인(烙印)을 찍고, 그다음은 수많은 데이터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없게 만든다. 안보와 경제, 불평등, 정의, 공평, 대형 사건은 인과관계가 대단히 복잡하고 어렵다. 전문가들조차 수개월 혹은 수년에 걸쳐 분석하고 실험해야 나올 수 있는 답을 즉시 말해야 한다. 인터넷이 그렇게 만들었다.
결국 모든 것을 믿거나 아무도 믿을 수 없어 인지 부조화 세상이 된다. 진실과 사실이 사라지고 거짓과 유사 거짓이 된 진흙탕 싸움에서 누가 최종 승자가 될 것인가? 답은 자명하다. 끝없는 소모전에서는 물량이 많은 쪽이 이기는 것은 당연하며 상대방을 공격할 연료를 끊임없이 공급하는 쪽이 이긴다. 그 연료는 바로 ‘감성’적인 글이며 사진이고, 그 밑바탕에는 괴물 같은 포퓰리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김홍유 경희대 교수, 한국방위산업협회 정책위원, 전 한국취업진로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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