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가 올해 정기 인사에서 1980~90년대생 오너 2~4세들을 전진배치하며 ‘8090세대 뉴오너 시대’가 열리고 있다. 등판의 시기는 이들에게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글로벌 저성장 국면, 고금리 장기화, 국제 질서의 재편과 지정학적 위기 등이 앞에 놓여 있다.
인공지능(AI), 반도체 등 미래 핵심 사업에 대한 국가 간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이와 함께 도널드 트럼프 2기에 적응하며 경영권도 지켜야 하고 신성장동력도 마련해야 한다. 단순한 한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경제의 미래라는 무거운 짐이 이들의 어깨에 지워져 있다.
오너가 2~4세들은 트럼프 2기 출범에 따라 커질 대외 불확실성 대응이 주요 과제다. 북미 수출이나 투자 비중이 큰 기업들은 트럼프 취임에 따른 무역 분야 불확실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 ‘트럼프 스톰’은 취임하기도 전에 이미 가시화하고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내각 인선이 끝나자마자 초강경 관세정책을 예고해 기업들의 긴장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트럼프는 최근 내년 1월 20일 취임 당일 중국에 대해서는 추가 관세에 더해 10%의 관세를 더 부과하고, 멕시코와 캐나다에는 25%의 관세를 각각 부과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겠다고 밝혔다.
트럼프의 관세 폭탄 예고에 한국 기업들은 비상이 걸렸다. 현재 한국 기업들이 멕시코와 캐나다에 상당수 진출해 있어 멕시코와 캐나다의 전 품목에 대한 25% 관세 부과가 멕시코·캐나다에서 생산하는 한국 기업의 대미 수출에 영향이 불가피하다. 미국 현지에서 멕시코·캐나다 부품을 조달해 생산하는 기업들과 멕시코·캐나다로 중간재를 수출하는 기업들에도 영향이 미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1기 때부터 중국 관세 회피의 우회로로 활용됐던 베트남이 다음 타깃이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베트남을 글로벌 공급망에서 주요 생산거점으로 활용해왔던 한국 기업들도 영향권 아래 놓일 수 있다.
베트남 정부는 자국 내 해외 기업 유치를 위해 기업 친화적 정책과 각종 인센티브 등 정책적 지원을 해왔다. 베트남은 인건비까지 저렴해 미·중 갈등 상황에서 중국을 대체할 제조업 최적지로 주목받아왔다.
삼성전자, LG전자 및 계열사와 1·2차 협력사, 포스코, 두산중공업, 효성, 현대차와 기아, 롯데 유통, GS, CJ 등 다수 대기업이 베트남 주요 산업 분야에 진출해 있다. 한국은 베트남의 외국인 투자국 148개 중 투자액의 17.9%, 프로젝트 수의 24.3%를 차지하고 있다.
산업연구원(KIET)은 ‘2025년 경제·산업 전망’ 보고서에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이 공약한 보편적 관세(10∼20%)가 실제로 부과되면 한국의 대미 수출이 8.4∼14.0%(약 55억∼93억 달러) 감소할 것으로 추산했다.
이 여파로 한국의 내년 경제성장률도 약 0.1∼0.2%포인트 낮아질 것으로 예상했다. 조상현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트럼프 2기 미국의 고율 관세 정책은 한국 수출에 가장 큰 위험 요인”이라며 “미국의 관세 정책이 한국 수출 성장세를 더욱 둔화시킬 가능성도 있다”고 예측했다.
일반적으로 오너 기업이 2세까지 생존하는 비율은 30%, 3세까지 생존하는 비율은 10%에 불과하다. 2~4세들의 경영 최대 난관은 상속세 부담과 친족 간 경영권 갈등이다. 특히 현행 상속세는 명목 최고세율이 5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 둘째로 높다. 최대주주 할증평가를 적용하면 실효세율은 최대 60%로 1위다.
그동안 재계는 과도한 상속세 부담에 승계는 물론 경영까지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며 제도 개선을 꾸준히 요구해왔다. 삼성의 경우 고(故) 이건희 회장 타계 이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비롯한 오너 일가의 상속세가 12조원대에 달한다.
한미약품그룹 경영권 분쟁도 상속세가 불씨였다. 동업자 간 경영권 분쟁에 사모펀드 MBK파트너스가 가세한 고려아연과 영풍·MBK 간 분쟁도 3세 경영 체제에 들어 상속세 부담 등으로 지배구조가 취약해진 상황에서 경영권 공격 대상이 됐다. ‘제2 한미약품·고려아연’이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다.
최근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제인협회를 비롯한 경제 6단체는 상속·증여세 개선 촉구 공동성명을 내고 “기업 승계 시 최대 60%에 달하는 상속세를 부담하고 있어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어렵고 외부세력에 의한 경영권 탈취 또는 기업을 포기하는 일들이 발생하게 된다”며 “상속세 최고세율을 글로벌 추세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고 했다.
정부는 올해 7월 25년 만에 상속세 최고세율을 50%에서 40%로 인하하고 기업 최대주주 할증과세(20%)를 폐지하는 세법 개정안을 발표했으나 야당이 반대하고 있다. 재계는 과도한 상속세가 기업 투자 약화, 주가 부양 제약 등 경제 역동성을 저해한다고 주장한다.
승계를 준비하는 2~4세 경영인 입장에서는 기업가치가 낮게 평가돼야 세 부담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투자와 주가 부양 등에 소극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최고 60%에 이르는 세율 때문에 상속세 납부 부담이 커져 주식을 처분하면서 경영인의 지분율은 하락한다. 대한상의는 최대주주가 상속세를 내고자 주식을 매도하면 지분이 최소 40%까지 하락할 수 있다고 했다.
창업주(1세대 경영자) 지분율이 100%라면 2세대는 40%, 3세대는 16%로 낮아진다. 승계 과정에서 지배력이 취약해진 2~4세들은 행동주의펀드화(化)한 사모펀드들의 타깃이 되고 있다. 글로벌 행동주의펀드 공격을 받은 한국 기업은 2019년 8개에서 2023년 77개로 9.6배 증가했다. 한국은 미국(550개)과 일본(103개)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행동주의펀드의 공격을 많이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대표는 “경영권이 3~4세로 넘어가면서 지분이 희석되는데 지분율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젊은 오너들은 자금력을 보유한 글로벌 펀드들의 경영권 공격 타깃이 될 수 있고 이런 리스크는 향후 더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 대표는 “오너 경영인들은 승계 과정에서 상속세 등을 줄이기 위해 핵심 계열사 주가를 낮게 유지하거나 지분 가치를 낮게 만들기도 한다. 경영권 공격에 대비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밸류업, 즉 기업 본질 가치를 높여주는 것”이라며 “기업가치가 높아지면 경영권 공격에 투입해야 하는 비용이 늘어 공격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들 대부분은 초고속 승진으로 입사 10년 이내에 임원 및 최고경영자가 된 오너 2~4세로, 아버지 세대와 비교해 풍부한 해외 경험과 세계 유수 명문대에서 수학한 글로벌 인재다.
빠른 경영 수업을 위해 글로벌 컨설팅펌이나 투자은행(IB) 등을 거치는 경우가 많아 회사에 입사하는 시기가 늦고 대부분 석사 이상의 학력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최소 부장급 이상으로 커리어를 시작한다. 이렇다 보니 일찍 경영에 합류해 밑바닥에서부터 경험을 쌓아왔던 기존 세대와 비교해 실전 경험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박주근 대표는 “한국 기업들은 제조업 기반의 산업자본 형태의 기업이 대부분인데 1980~1990년대생 젊은 오너들은 이 분야에 대한 경험과 노하우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보니 기업공개(IPO), 인수합병(M&A) 등 금융을 가지고 경영을 하려고 하는데, 오너 경영 체제에서는 경영 실패에 대한 책임을 결국 주주와 기업이 지게 된다”고 지적했다. 박 대표는 “오너 경영인과 전문경영인 체제의 조화로 상호견제 기능을 강화하는 것이 해법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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