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문학은 시공간을 초월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설마다 라디오나 TV 프로그램 묘사를 통해 당대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흐른다. 소설가가 문장으로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역사적 기록을 통해 우리는 그 시대의 어떤 상을 그릴 수 있다. 그러다보면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나라라는 낯섦보다 인간이라면 충분히 느낄법한 보편적인 심리를 마주하게 된다.
1980년대 초중반을 묘사하고 있는 그의 소설 <맡겨진 소녀>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가톨릭이 일반인에 가한 압력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당시 아일랜드에서는 이혼과 피임이 금지돼 ‘원치 않는 아이들’이 숱하게 태어났다. 또 미혼모의 영아 살해나 천주교 복지시설의 아동학대, 천주교 신부의 성폭력 사건도 잇따랐다. 권력화한 종교의 힘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하는 건 불가능했다. <맡겨진 소녀>에서는 부모는 있지만 가정 내에서도 최소한의 돌봄을 받지 못한, 몇 번째 딸인지도 모를 소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는 수녀원이 운영하는 세탁소에서 강제 노동을 당하는 여성들이 나온다. 주인공 빌 펄롱의 아내가 “살아가려면 모른 체 해야하는 것들”이라고 표현한 이들은 대부분 10대~20대 초반의 미혼모로 그려진다.
소설 <맡겨진 소녀>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키며 모두 영화로 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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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는 영화 '말없는 소녀'로 재작년 개봉하자마자 엄청난 호평을 이끌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지난 11일 개봉해 관객을 만나고 있다. 영화 ‘오펜하이머’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탔던 킬리언 머피가 다섯 명의 딸을 둔 가장, 빌 펄롱을 맡았다. 인류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게 할 수도 있는 선택을 앞두고 고뇌하는 명연기를 선보였던 그는 이번 작품에서도 자칫하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선택을 놓고 고민하는 역할을 맡았다. 킬리언 머피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작가 클레어 키건이 그리는 시대의 부조리속에서 자라난 인물이기도 하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고 머피가 키건에게 영화화를 설득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을지도 모른다.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원작을 충실히 따른다. 작은 석탄회사를 운영하는 빌 펄롱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석탄을 배달하러 간 수녀원에서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며 벌어지는 심경의 변화다. 작품 속 수녀원은 18세기부터 20세기말, 정부의 협조와 묵인 아래 가톨릭 수녀원이 운영하며, 불법적인 잔혹 행위를 저질렀던 막달레나 세탁소가 배경이다. 수녀원 석탄 창고에 갔던 빌은 그곳에 갇혀있는 10대 소녀 세라를 발견한다. 그는 출산을 5개월 남긴 미혼모였다(소설에서는 이미 출산을 한 채 수녀원에서 짐승만의 취급도 받지 못하는 신세로 그려진다).
수녀들은 굳은 표정으로 세라를 압박하고 “다른 여자아이들이 자신을 가뒀다”는 거짓 증언을 빌 앞에서 실토하게 만든다. 무언가 문제를 제기하고 싶은 표정의 빌에게, 원장 수녀는 그의 아내 이름이 쓰여진 크리스마스 카드를 건넨다. 카드 속에는 거금의 지폐가 있었고 이는 이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발설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과도 같은 것이었다.
빌은 자신도 미혼모의 아들이었던 사실과 자신들을 거둬준 어느 귀부인과의 유년 시절을 떠올리며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사고를 치는 아이들(수녀원에 있는 아이들)과 우리 아이들은 다르다"고 선긋는 아내에게 빌은 "그래도 당신은 이상하지 않은거냐"며 목소리를 높인다. 과묵하고 따뜻한 눈빛을 가졌던 빌이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장면이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거실 벽난로에는 자녀들이 산타에게 쓴 편지들이 땔깜과 함께 타오른다. 먹고 사는 것이 최전선인 아내에게 빌의 선량함과 크리스마스 선물에 대한 기대를 담은 딸들의 편지란 생계에 도무지 도움되지 않는 것들이다.
크리스마스 이브 예배에서, 빌은 주님의 자애로움을 읊으며 예배를 인도하는 원장 수녀를 무표정하게 바라본다. 빌이 자주 찾는 펍의 주인은 조심스럽게 걱정의 말을 전한다. "수녀원에서 '어떤 소동'이 있었다면서? 그곳과 부딪쳐선 안 돼. '그것'이 알려지면 당신 주변이 당신을 손가락질하고 척지게 될 거야." 그 말을 들은 빌의 얼굴은 혼란 속에서 어떠한 결론을 내린 표정이었다.
크리스마스 새벽, 빌은 남은 석탄을 수녀원에 배달하러 들른다. 창고에서 그는 "지금이 낮인가요, 밤인가요"라고 묻는 세라를 또다시 만나게 된다. 몇일째인지도 모를 시간동안 창고에 갇혀 있던 아이를 일으킨 빌은 그길로 세라를 집으로 데리고 간다. 집으로 걸어갈 동안 마을 사람들이 두 사람을 보지만 빌은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빌은 자신의 집 현관문 앞에 어정쩡하게 서있는 세라에게 손을 내민다. 그는 곧 아이들이 재잘대는 거실로 세라와 들어가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어떤 작품을 읽든, 클레어 키건의 문장은 군더더기가 없다. <이처럼 사소한 것>은 그의 작품 가운데 분량도 가장 짧다. 역대 부커상 후보에 오른 가장 짧은 소설로 알려져있을 정도. 키건의 단문이 영화라는 시각 매체를 만난다고 알려졌을 때, 펄롱의 심리 묘사는 어떻게 영화에 담길지 궁금했다. 그런데 키건의 문장은 독백이 아닌, 킬리언 머피의 눈빛과 행동으로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선택 앞에 고뇌하는 펄롱의 내면을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순 없을 것 같았다. 미혼모들이 낳은 아기들의 울음, 수녀원에 갇힌 아이들의 비명 소리가 뜰 앞의 요란한 거위 울음에 묻히는 장면은 글로 읽었을 때보다 시각화해 접했을 때 더 극적이었다. 그런 가운데 빌이 손을 내미는 행위는, 세라에게는 세상이 달라지게 되는 구원의 손길이자 키건의 문학이 왜 세계적 명성을 얻었는지 다시금 깨닫게된 장면이다.
이해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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