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보르도의 ‘샤토 무통 로칠드’(Chateau Mouton Rothschild·무통)는 와인을 예술로 승격시킨 최초의 와인이다. 바통 필립 드 로칠드 남작(1902~1988·바롱 필립)은 당대 최고 예술가들에게 와인 라벨 작업을 부탁했고, 1945년부터 매년 다른 작가들이 무통의 와인 라벨을 그렸다. 80년간 쭉 이어온 무통의 전통은 와인 애호가 사이에선 꿈의 컬렉션이다. 2015년 홍콩 소더비 경매에선 무통의 1945~2012년 빈티지 컬렉션(66병)이 37만6900달러(약 5억3000만원)에 팔렸다.
미감을 자극하는 보틀은 강력한 매력이지만, 기본은 프랑스 보르도 1등급 와인의 검증된 맛이다. 카베르네 소비뇽(79%), 멜롯(17%), 카베르네 프랑크(3%), 프티 베르도(1%)의 섬세한 배합으로 부드러운 목 넘김과 풍부한 보디감, 입안에 오랫동안 퍼지는 잔향까지, 세계 최고의 와인 중 하나로 인정받는다.
무통의 2022년 빈티지 와인 라벨 공개가 있는 날. 11월 30일 프랑스 보르도에 있는 무통의 와이너리에서는 1년 중 가장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과연 올해의 아티스트는 누구일까? 다양한 추측이 오가는 가운데 행사 직전까지 스포일러는 없었다.
공개 시간은 오후 7시. 무통 측은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비밀스러운 준비로 분주했다. 10분 전에 행사장에 들어섰다. 2022년 빈티지 와인과 올해의 작품이 나란히 붉은색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리고 곧 올해의 아티스트와 2022 빈티지 라벨이 최초로 공개됐다.
무통의 공동 소유주이자 예술 및 문화 활동을 담당하는 줄리앙 드 보마르셰 드 로칠드는 “우리에겐 라벨 공개 행사가 매우 특별한데, 올해는 더 특별하다. 바롱 필립 드 로칠드가 샤토 무통 로칠드를 맡은 지 딱 10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라고 소개했다.
곧이어 그가 올해의 아티스트를 호명하는 순간은 행사의 하이라이트. “바롱 필립 드 로칠드가 무통을 맡은 지 100주년을 기념해 아주 독특하고 멋진 해석을 해주신 아티스트를 소개합니다. 올해의 아티스트는 바로, 제라드 가루스트!” 아티스트의 이름이 호명되자 “와우!” 환호와 탄성이 쏟아졌고, 모두의 시선이 무대 오른쪽 문을 향했다. 곧이어 프랑스의 현대미술가 제라드 가루스트(78)가 지팡이를 짚고 깜짝 등장했다.
가루스트는 지난해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전시회를 연 작가다. 70대 후반의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현대 미술가다. 그는 뒤샹 등 초현실주의 아티스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신화적이고 우화적인 표현과 독특한 시각적 언어로 작품 세계를 구축해왔다.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관심이 많아 1991년 ‘라 수르스(La Source)’를 창립해 소외된 아이들이 예술을 경험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2015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기사 직위를 받은, 프랑스 내에서도 존경받는 아티스트다.
제라드는 “무통의 라벨 작업은 큰 영광이었다”며 “ 아티스트로서 늘 신화에 관심이 많았는데, 와인과 포도나무에 얽힌 무통의 이야기는 큰 영감을 줬다”고 밝혔다. 이어 “모험이었고 도전이었다”며 “무통은 세계 최고의 와인으로, 그 어떤 브랜드의 디자인과 비교할 수 없는 작업”이라고 강조했다.
무통의 라벨 아트는 1945년부터 이어졌다. 그리고 파블로 피카소, 마르크 샤갈, 앤디 워홀, 데이비드 호크니 등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이 무통의 와인 라벨 디자인에 동참했다. 2013년에는 한국 작가 이우환 화백이 무통의 컬렉션에 이름을 올렸다. 무통은 아티스트와 협업하는 대가로 돈이 아니라 와인을 증정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작업한 해의 빈티지 와인 한 상자와 예술적으로도 가치가 큰 역사적인 빈티지 컬렉션을 증정하는 것으로 아티스트의 노고에 화답한다. 돈 그 이상의 가치를 주고받는 무통만의 전통으로, 예술가와의 관계를 더 탄탄하게 하는 요소다.
1945년부터 2024년까지 그렇게 매년 작업한 작가들의 면면은 화려하다. 무통의 와이너리에서는 세계적인 유명 화가들이 그린 무통의 라벨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2개 층의 전시 공간에는 살바도르 달리(1958), 호안 미로(1969), 마르크 샤갈(1970), 바실리 칸딘스키(1971), 파블로 피카소(1973), 프랜시스 베이컨(1990), 앤디 워홀(1975), 데이비드 호크니(2011) 등 아티스트의 라벨 작업 과정과 완성된 작품이 걸려 있다. 피카소 관련 기사나 미로가 작업 당시 썼던 붓, 이우환 화백의 붓, 영국의 찰스 3세 국왕이 보낸 서신 등 작업 과정이 전시된 박물관이기도 하다.
무통의 라벨 컬렉션은 그 자체로 예술적 가치가 높아 순회 전시도 열렸다. 1981년부터 ‘페인팅 포 더 라벨스(Paintings for the Labels)’라는 타이틀로 세계 곳곳에서 전시를 열었고 1983년 로열스코티시 아카데미, 1985년 영국 런던 V&A뮤지엄을 비롯해 뉴욕, 도쿄, 홍콩 등 세계 각지를 돌았다.
줄리앙은 앞으로도 무통의 라벨 아트 전통을 이어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와인은 살아있는 아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도 현존하는 최고의 아티스트들과 계속 작업해 나갈 것”이라며 “무통과 아트(Mouton&Art)라고 부르고 싶다.
단순한 라벨을 넘어서 그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보르도=조민선 아르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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