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12월 18일 17:05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사촌 형님의 며느리가 내 딸입니다. 제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2007년 11월 29일. 이준용 DL그룹(옛 대림그룹) 명예회장은 당시 기자간담회에서 울분을 토했다. DL그룹과 한화그룹은 사돈 관계다. 이 명예회장의 막내딸은 김승연 회장 사촌 형인 김요섭 씨의 아들과 2004년 결혼했다.
이 명예회장이 간담회를 연 것은 DL과 한화가 50대 50으로 합작한 화학회사인 여천NCC 경영을 놓고 분란을 겪은 결과였다. 한화그룹이 DL그룹에 여천NCC 지분 매각을 요구하자 이에 분노해 이 명예회장은 간담회를 자청했다. 두 회사의 갈등은 우여곡절을 거쳐 봉합됐다. 여천NCC는 최근 20년 동안 4조4000억원가량을 배당하면서 한화와 DL의 '캐시카우'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요즘 분위기는 다르다. 배당은커녕 되레 자금지원에 나서야 할 만큼 회사 재무구조가 나빠졌다. DL그룹과 한화그룹의 고민거리로 전락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18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여천NCC는 2000년~2021년에 4조4300억원의 배당을 실시했다. 이 기간 모회사인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에 각각 2조2150억원씩을 지급한 것이다. 같은 기간 순이익 누적액(5조110억원)에 육박하는 규모다. 이 기간 배당 성향은 88.4%에 달했다. 여천NCC는 번 돈 대부분을 배당으로 모회사에 지급한 것이다.
하지만 2022년부터 올해까지는 1원도 배당하지 않고 있다. 2022년부터 적자행진을 이어간 것과 맞물린다. 여천NCC는 2022년에 3477억원, 지난해에는 2402억원, 올해 9월 누적으로는 1264억원의 순손실을 각각 기록했다. 2001~2021년 연평균 2400억원의 순이익을 기록한 여천NCC는 적자로 전환하면서 재무구조도 상당히 나빠졌다.
여천NCC는 1999년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이 보유한 여수의 나프타분해설비(NCC)를 합쳐 세운 합작사다. 생산한 에틸렌을 비롯한 화학제품을 생산해 한화솔루션 DL케미칼 등에 납품하고 있다. 에틸렌 생산능력은 LG화학 롯데케미칼에 이은 3위다. 이 회사 경영은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이 파견한 두 명의 공동 대표이사가 맡고 있다.
생산한 제품의 안정적 수요처를 확보한 만큼 2001~2021년 연평균 2400억원의 순이익을 기록한 이 회사는 배당은 물론 직원 연봉도 후하게 지급했다. 지난해 평균연봉이 1억500만원으로 수년째 연봉이 1억원을 웃돌았다. 높은 연봉 덕분에 석유화학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신의 직장’으로 통했다. 여천NCC가 좋은 실적을 거두자 회사 경영권을 놓고 2007년에 DL그룹과 한화그룹이 충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회사는 합작회사로서 성장 여력에 한계를 드러냈다. 에틸렌 생산 사업에만 집중한 것이다. 안정적 실적을 내는 만큼 신사업 등 새 성장동력을 발굴할 유인이 크지 않았던 탓이다. 모회사인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이 서로 견제하고 있는 만큼 여천NCC가 신사업을 추진할 추진력도 크지 않았다. 여기에 번 돈을 대부분 모회사에 배당으로 지급하는 만큼 신사업 재원도 많지 않았다.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은 2022년 실적이 나빠진 여천NCC를 분할해 각각 설비를 가져가는 방안도 추진했다. 하지만 분할할 경우 '규모의 경제' 효과가 반감되면서 보유한 여천NCC 설비 가치가 더 나빠질 것이라는 우려가 커졌다. 결국 분할 계획은 백지화한 것으로 전해진다.
여천NCC 실적이 계속 나빠지면서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의 고민은 한층 깊어졌다. 여천NCC 회사채 조기상환 우려가 불거진 것이다. 한국기업평가와 한국신용평가는 지난 11일 여천NCC 신용등급을 A0에서 A-로 낮췄다. 덩달아 회사채 조기상환 우려도 불거졌다. 여천NCC 신용등급이 BBB+로 떨어지면 회사채 700억원어치를 조기 상환해야 한다. 모회사들은 여천NCC의 조기상환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 수천억원대 자금 지원을 저울질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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