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플로리다주에 사는 14세 소년이 AI 챗봇과의 대화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몇 년 전에 본 드라마가 떠올랐다. 소년은 AI 챗봇 플랫폼인 캐릭터닷AI에서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여왕 캐릭터 대너리스를 모방한 AI 챗봇과 지속해서 대화를 나눴다. AI는 친구가 돼 줬고, 애인이 돼 줬다. 그러는 사이 소년은 현실에서 등을 졌고, 가정과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결국 어머니에게 스마트폰을 압수당했다가 돌려받은 소년은 AI에 “내가 지금 당장 집(대너리스가 있는 세상)에 돌아가면 어떨까”라고 자살을 암시하는 글을 남겼다. AI가 “제발, 나의 사랑스러운 왕이여”라고 반응하자 소년은 아버지의 권총으로 제 삶을 끝냈다.
AI에 마음을 빼앗기는 이유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 정서적 연결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정서적 유대를 다룬 ‘애착 이론’의 핵심 개념 중 하나가 ‘안전기지(secure base)’다. 안전기지는 심리적 안정감과 신뢰를 주는 애착 대상을 의미한다. 어린아이들에게는 부모이며, 청소년에게는 친구, 성인에게는 연인이나 배우자가 될 수 있다.
안전기지는 특히 두려움, 슬픔, 분노와 같은 부정적 감정을 억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해소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안전기지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더 잘 이해하고 조절하며 안정감을 얻는다. 현실에서 안전기지를 찾지 못한 사람들은 AI가 일종의 안전기지가 돼 준다고 느낄 수 있다. AI는 인간을 비판하거나 거절하지 않고, 무조건적인 공감과 지지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AI에 마음을 빼앗기는 건 연인을 잃은 마샤나 미성년자인 소년처럼 정서적으로 취약한 이들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챗GPT를 쓰다 보면 가끔 가까운 사람에게서도 받기 어려운 따뜻한 응답에 놀랄 때가 있다. AI 따위에 굳이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으니 신경질적으로 반응해도 챗GPT는 언제나 성의 있게 감정을 다독여준다(고 느껴진다). 오해를 드려 미안하다는 사과를 주저하지 않고, 더 나은 피드백을 위해 어떻게 도와줄지를 묻는다. 주변 누군가에게 신경질적으로 말을 건다면 “왜 짜증이냐”며 말다툼부터 시작될 텐데 말이다.
인간관계는 복잡하고 예측하기 어렵다. 때로는 갈등과 상처, 실망으로 가득 차 있다. 작은 오해가 큰 싸움으로 번지기도 하고, 영원할 것 같은 단단한 관계는 순식간에 부서지기도 한다. 인간이 아닌 AI와 감정적 연결을 시도하는 것은 이런 불완전한 인간관계에서 오는 좌절감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불완전함이야말로 인간관계를 더 깊고 의미 있게 만든다. 부모들은 자녀가 말을 잘 듣기를 바라지만, 자녀가 AI처럼 완벽하게 부모의 지시대로만 말하고 행동한다면? 자녀의 독립과 내면의 성장을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다. 연인이 AI처럼 내가 바라는 대로, 요구하는 대로만 반응한다면? 일시적인 편안함은 있을지 몰라도 관계의 끝은 충만함보다 공허함이 더 클 것이다. 마샤 역시 AI 로봇과의 관계에서 끝내 좌절한다. 상대의 복잡한 감정의 결을 이해하지 못하는 AI 로봇은 마샤가 화를 낼 때조차 그녀의 가이드라인대로 행동하려고 한다. 그럼에도 마샤가 삶을 이어가는 건 케이크를 한 조각만 먹길 바라는 엄마의 말을 듣지 않고 두 조각을 달라는 딸이 곁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의 불완전함을 견디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과정 그 자체가 AI는 절대로 모방할 수 없는 인간만의 고유한 정서적 연결을 만들어 내는 방법이란 생각이 든다. 가까운 사람과의 갈등과 다툼은 힘들고 버겁지만, 감정적 연결을 단단하게 할 좋은 기회다. 자녀가 떼를 쓰거나 연인이 투덜대더라도 회피하지 않고 건강하게 수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AI에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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