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 혹한기'…대기업 M&A 7년 만에 최저

입력 2024-12-22 17:59   수정 2024-12-23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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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국내 주요 기업의 인수합병(M&A)과 타기업 출자 규모가 7년 만에 최저 규모로 쪼그라들었다. 세계적으로 인공지능(AI), 바이오, 전기차 등 성장 산업 투자와 합종연횡이 늘어나는 것과 대조적이다. 국내 기업이 수출 부진과 원·달러 환율 고공행진, 정치적 불확실성 등 대내외 악재에 짓눌려 미래 먹거리 확보 경쟁에서 뒤처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22일 한국경제신문의 자본시장 전문 매체인 마켓인사이트에 따르면 공정거래위원회 지정 기준 국내 20대 대기업이 올 들어 단행한 M&A 규모는 4조8192억원이었다. 바이아웃(경영권 인수)과 소수 지분 투자를 포함한 수치로, 2017년(3조6407억원) 후 7년 만에 가장 적다.

‘역대급 딜 가뭄’으로 불린 지난해(6조1736억원)와 비교해도 21.9% 감소했다. 글로벌 M&A 시장 흐름과는 정반대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 따르면 올 들어 3분기까지 전 세계 M&A 규모는 2320조원(약 1조5960억달러)으로 전년 대비 10%가량 늘었다.

올해는 국내 대기업의 조 단위 ‘빅딜’이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다. 20대 대기업이 1조원 이상 기업을 인수하거나 투자한 사례는 현대자동차가 미국 자율주행기업인 모셔널에 1조2663억원을 투입한 게 유일하다. 대한항공의 아시아나 인수 건은 2020년 발표하고 2026년 완료할 예정이어서 올해 집계에 포함하지 않았다.

20대 기업 중 롯데, GS, 농협, KT, 한진, 카카오, DL, 셀트리온, HMM 등 9곳은 올해 M&A가 전무했다. 2~3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 M&A업계의 큰손으로 꼽히던 기업이지만 올해는 비주력 사업부를 팔고 자산을 유동화해 현금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대기업 절반 'M&A 제로'…新성장산업 투자커녕 알짜자산 줄줄이 매각
20대 기업 올해 M&A 현황…미래 먹거리 확보 비상
국내외 인수합병(M&A) 시장에서 매매를 컨설팅하는 투자은행(IB) 전문가들은 올해도 문턱이 닳도록 대기업 사옥을 드나들었지만 대기업들 태도는 예년과 확 달라졌다. 2~3년 전까지만 해도 ‘살 만한 기업 매물을 들고 오라’는 요청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계열사나 자산을 팔려고 하니 매수자를 찾아달라’는 주문이 끊이질 않는다.
기업 인수는 옛말…파는 게 우선
22일 한국경제신문의 자본시장 전문 매체인 마켓인사이트에 따르면 국내 20대 대기업 가운데 아홉 곳이 올해 단 한 건의 M&A도 하지 않았다. 대부분 2~3년 전까지만 해도 M&A업계 주요 바이어들이었다. 롯데 GS KT 카카오가 대표적이다. 카카오는 2021년 1조7292억원(8건), KT 3762억원(5건), 롯데 3565억원(3건), GS는 2952억원(3건)의 M&A를 했다. 카카오는 크로키닷컴을 1조원에 인수했고 카카오엔터테인먼트(타파스미디어, 글링크미디어, 영화사 집) 카카오모빌리티(스트리스, 코리아드라이브, 딜카, 플러스티브이) 등 계열사도 광폭 행보를 보였다.

롯데의 변화도 눈에 띈다. 롯데는 2022년에만 9119억원(6건)의 M&A를 했다. 한국미니스톱(3136억원) 한샘(2595억원) 바이오 의약품 제조공장(2054억원) 쏘카(1832억원) 등을 사들였다. 하지만 올해 인수를 멈추고 매각 기조로 돌아섰다. 롯데렌터카를 사모펀드(PEF) 운용사인 어피니티에쿼티파트너스에 매각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 각 계열사 비주력 사업의 카브아웃(사업부문 분사 후 매각)도 추진 중이다.

KT와 GS도 마찬가지다. KT는 최대 3조원 규모 부동산 유동화에 나섰다. 금융보안 계열사인 이니텍도 판다. GS는 GS엘리베이터를 PEF에 팔았고 조 단위 가치로 평가되는 스페인 수처리 회사 GS이니마도 매물로 내놨다.

SK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계열사를 파는 데 집중하고 있다. SK스페셜티(약 4조원), SK렌터카(8200억원), SK넥실리스 박막사업부(950억원)를 매각했거나 파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CJ는 그린바이오 세계 1위인 바이오사업부를 매물로 내놨다. 예상 몸값이 6조원대로 올해 들어 나온 매물 중 최대 규모다.

국내 대기업들이 미래 먹거리 확보에 위축된 것과 대조적으로 세계 M&A는 급증하고 있다. 보스턴컨설팅그룹에 따르면 올해 들어 9월까지 글로벌 M&A 규모는 1조5960억달러로 지난해(1조4540억달러)보다 10%가량 늘었다. 고금리 영향으로 한동안 위축됐지만 인공지능(AI), 헬스케어 등을 중심으로 투자 열풍이 불면서 다시 불이 붙었다.
‘성장형’ 대신 ‘불황형’ M&A만
M&A와 함께 ‘성장형 투자’인 그로스캐피털이 사라진 게 더 큰 문제란 지적이 나온다. 그로스캐피털은 기업이나 산업이 지금보다 크게 성장할 것이라는 기대로 소수 지분이나 메자닌(주식 관련 사채)에 투자하는 전략이다. PEF는 특정 산업이 고성장 초입에 있다고 판단되면 바이아웃(경영권 인수) 못지않게 그로스캐피털을 늘린다.

하지만 국내에서 대표적 고성장 산업으로 평가받던 반도체와 2차전지, 바이오에 대한 투자는 얼어붙었다. 한 PEF 투자담당 임원은 “산업 역동성이 떨어지면서 투자 후보군을 추리는 것조차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성장형 투자가 사라진 자리엔 불황형 M&A만 성행하고 있다.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부진하거나 비주력인 사업부와 계열사를 매각하는 딜로 SK렌터카 롯데렌탈 에코비트 등이 대표적이다.

기회를 틈타 혼란을 겪는 기업을 집어삼키려는 적대적 M&A도 주목받고 있다. 국내 최대 PEF인 MBK파트너스는 올해 들어 행동주의를 가미한 바이아웃 전략으로 선회했다. 최대주주인 영풍과 손잡고 고려아연 경영권을 노리고 있다.

IB업계 관계자는 “원·달러 환율 고공행진과 주가 부진 등으로 기업이 인수대금 마련과 대규모 투자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며 “성장 산업 둔화에 탄핵정국, 다음달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 출범 등의 불확실성까지 덮친 만큼 M&A 한파는 내년에도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은/박종관 기자 hazz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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