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의 기적을 믿어요] 2편. 로사의 아주 특별한 네 시간 (2)

입력 2013-12-19 09:30  

2007년 1월, 모잠비크
“아이가 살아 있는 건 처음이에요.”
로사는 이렇게 말했다. 로사의 나지막한 대답에 충격을 받은 나는 구석에 있던 철제 의자를 가져와 그녀의 침대 곁에 바짝 다가앉아서 대화를 시작했다. 모잠비크의 유니세프 직원이 통역을 도와주었고 다른 일행은 병동의 다른 산모들과 이야기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아이 이름이 뭐예요?”
로사는 갓 태어난 아이를 돌아보며 뺨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아직 이름이 없어요.”
우리 직원이 옆에서 아프리카의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이름을 짓지 않고 며칠 후에 짓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이 병원에는 어떻게 오게 됐어요? 근처에 사나요?”
로사는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통역이 몇 마디를 덧붙여 질문을 다시 했다. 그리고 로사가 걸어서 네 시간 거리에 있는 방 한 칸짜리 오두막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논에서 한창 쌀을 추수해 바구니에 넣던 차에 진통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진통이 시작되고 나서 어떻게 했어요?”
“그냥 바구니를 내려놓고 여기로 걸어왔어요.”
정말 믿기지 않는 얘기였다.
“진통이 계속되는 와중에 땡볕 아래를 혼자 네 시간이나 걸어왔단 말이에요?”
바깥 기온은 섭씨 41도에 달했고 나는 그냥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로사는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혹시 옷이나 신생아 용품 같은 것도 챙겨왔나요?”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로사는 그런 질문 자체가 이상한 모양이었다. 대화를 시작하고 5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로사와 갓 태어난 아이를 보고 있노라니, 나와 너무나 비교가 되는 것이었다.
롱아일랜드의 제일 좋은 병원에서 첫째 아들 리를 낳았던 때가 떠올랐다. 나는 예정일 몇 주 전부터 만반의 준비에 돌입했다. 라마즈 호흡을 배우고 출산에 관련된 책을 몇 권이나 읽었다. 그리고 시끌벅적한 출산 축하 파티를 열어서 얼마 후 태어날 아기에게 필요한 온갖 물건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 친정엄마가 병원에 가져갈 커다란 출산 준비 가방을 장만해주셨다.
그런데 여기 있는 로사는…. 그 땡볕 아래를 혼자서 네 시간이나 걸어 병원까지 왔다. 그리고 샴페인이나 화환은커녕 보드라운 배냇저고리 하나 없이도 그저 아이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모든 게 완벽하게 갖춰진 현대식 병원에서 출산하면서, 나는 이와 다른 환경에서 아이를 낳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후줄근한 병동에 누워서, 고작해야 창문을 겨우 가리는 천조각밖에 없는 곳에서 홀로 아이를 낳는 사람이 있는 걸까?
로사는 자신의 현재 생활에 대해서 더 자세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에서 분노나 고통스러움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깊은 감동과 자신의 부족한 삶에 대한 이해심 그리고 자신의 고난을 묵묵히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느낄 수 있었다.
“첫 번째 아이는 낳자마자 죽었고, 둘째 아이는 임신 초기에 유산 됐어요.”
로사는 이렇게 말하면서 곤히 잠든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어제 일은 어제 일이죠. 오늘은 새로운 태양이 뜨니까요. 이렇게 예쁜 딸이 태어났잖아요.”
나도 모르게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물론이죠, 정말 행복한 일이에요.”
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흔쾌히 들려준 로사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서로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지만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 대 엄마로서 대화를 나누었다.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아이를 품에 안고 있을 때의 그 가슴 뻐근함을 우리는 알고 있었고, 내 아이가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점만도 신께 감사드리고 싶은 엄마의 마음은 똑같은 것이니까.
“사실 저한테 에이즈 바이러스가 있거든요. 아기를 가진 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건강해지려고 이곳에 와서 약을 타 먹었어요.” 로사는 아기 쪽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건강한 아이를 낳고 싶어서요.”
사실 지금까지의 내겐, 유니세프가 에이즈를 박멸하기 위해 해온 모든 노력이 추상적인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로사와 이야기를 나눈 후에야 비로소 유니세프가 에이즈 환자에게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유니세프의 노력 덕분에 내 눈앞의 산모도 건강한 아이를 출산할 수 있었다.
“아기를 데리고 진찰을 받으러 와야잖아요. 언제쯤 다시 와요?”
로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모레요.”
이제는 내가 어리둥절해졌다. 내 표정을 보고 로사가 무언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직원의 통역에 따르면 ‘항바이러스 약을 먹어야 하므로’ 매일 병원에 와야 한다는 의미였다.
“내일 약을 받아 가면 되잖아요.”
로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전 글을 읽을 줄 몰라요. 그래서 약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모르거든요. 여기서는 먹는 법을 가르쳐주니까…. 혹시라도 잘못되지 않게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에요.”
순간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다. 행여나 딸에게 에이즈 바이러스를 옮길까 싶어서, 몇 주 동안 매일같이 병원을 오가겠다는 것이다. 로사는 땡볕 아래 아이를 안고 네 시간을 걷는 것이 힘들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마을의 다른 여자들처럼 자신의 아이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다.
그건 나와 로사 사이에, 아니 전 세계 모든 엄마의 마음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공통점일 것이다. 일단 엄마가 되고 나면 내 새끼가 생겼다는 기쁨에 온갖 힘든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엄마는 누구보다 강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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