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의 기적을 믿어요] 7편. 브라질에서 만난 작은 영웅

입력 2014-02-07 09:30  

"서로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은 같은 입장에 서지만 서로 다른 점을 가진 사람들은 상대에게 끌리는 법이다."
- 톰 로빈스
2009년 8월, 브라질
개발도상국의 아이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희생자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그들의 삶을 바꾼 것처럼 우리의 삶을 바꿔놓을 능력을 지닌 영웅도 가끔은 있게 마련이다. 나는 아마존 유역에 있는 브라질 마나우스의 한 회의실에서 그 사실을 깨달았다.
옆에는 일곱 명의 미국인 엄마와 아이들이 있었고, 내 첫째 아들 리도 함께였다. 아이들은 열 살에서 열다섯 살 사이의 한창때라 그런지 한시도 가만있지를 못했다. 일행은 바로 어제 브라질에 도착했고, 개발도상국에 온 건 다들 처음이었다. 아이들은 전 세계에서 역경을 겪고 있는 또래들에 대해 배워보자는 목적에서 따라나섰지만, 낯선 곳에 적응하려고 애를 쓰면서도 집에서 챙겨온 게임기에 훨씬 더 열을 올리고 있었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브라질 소년 하나가 들어왔다. 본래 나이는 열여섯 살이었지만, 몸집이 왜소하고 덥수룩한 머리카락에 반짝이는 눈동자와 부끄럼을 타는 미소 탓인지 더 어려 보였다. 한 열두 살 정도? 소년은 청바지에 하얀 반소매 폴로셔츠를 갖춰 입은 단정한 모습이었다. 분명히 소년이 들어오는 걸 보았을 텐데도 우리 애들은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아이팟을 다루는 소리만 이어졌다.
유니세프 브라질 지사의 직원 하나가 좌중에게 정숙해줄 것을 청했다. 그러고는 소년에게 마이크를 넘기면서 사람들에게 자기소개를 하라고 했다.
“안녕하세요.”
소년은 땅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렇게 입을 뗐다. 다소 머뭇거리는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분명히 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미국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연설을 하는 일이 매우 어색한 모양이었다.
“제 이름은 RC입니다. 마나우스에 살아요. 아주 긴 시간이 걸려서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이 자리에 서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순간 아이들 몇몇이 고개를 들고 소년의 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오신 손님들에게 제 얘기를 들려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한순간도 아프지 않았던 적이 없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항상 병을 달고 살았어요.”
드디어 모든 아이가 고개를 들었고 게임기보다 훨씬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처음에는 제 병이 어떤 건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 병이 뭔지 알게 되었을 때는 남들에게 얘기할 수 없었어요. 엄마가 말하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저는 HIV 양성자입니다.”
회의실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속삭이는 소리조차 없었다. 아이팟을 만지작거리는 소리도 몸을 뒤트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RC는 계속해서 얘기를 이어나갔고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다들 그의 얘기에 빠져들었다.
RC는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HIV 양성자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자세히 들려주었다.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었어요. 그랬다간 친한 친구들조차 나를 따돌릴 것 같아서요. 나랑 다니다가 전염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그래서 너무나 외로웠죠. 저희 엄마도 HIV 양성 판정을 받았어요. 하루하루 병이 깊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되겠구나 생각했죠. 워낙 몸이 약하셔서 종일 누워만 계실 때가 많아요. 제가 먹을 음식을 해줄 수도 없고, 저를 학교에 데려다 줄 수도 없어요. 도리어 제가 엄마를 돌봐드려야 해요. 하지만 엄마한테 얼마나 아프냐고 묻지는 않아요.
저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HIV에 감염된 채로 태어났어요. 엄마는 그런 병을 가지고 태어나게 해서 미안하다고 늘 말씀하세요. 저는 엄마를 위해서 강해지고 싶어요. 제가 슬퍼하거나 아픈 모습을 엄마에게 보여드리고 싶지 않아요.
예전에 엄마가 많이 아파서 병원에 모시고 갔는데 그곳에 계신 분들이 엄마가 HIV 환자라고 했어요. 엄마가 치료를 받는 동안 저도 HIV 검사를 받았어요. 제가 HIV 양성자라는 것을 그때 알았어요. 그때부터 약을 먹고 있는데 마을 친구들은 아직도 몰라요.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우울해서 항상 혼자 지내거든요. 어차피 친구들이랑 있어도 예전처럼 못 노니까, 그냥 혼자 있는 게 더 편해요.”
어느 순간 RC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자기 얘기를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하는 것이 처음이라는 게 느껴졌다. 우리 일행 중에서 제일 말썽을 피우던 녀석조차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유니세프에서 일하시는 어떤 분이 저 같은 아이들끼리 인터넷으로 채팅을 하는 곳이 있다고 말씀해주셨어요. 서로 궁금한 것도 물어보고, 고민도 털어놓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자기가 누군지 절대 알리지 않아도 되고요. 저도 그 친구들과 채팅을 하고 싶었지만, 컴퓨터가 없어서 할 수가 없었어요. 제 친구 중에도 컴퓨터를 가진 애들은 하나도 없거든요. 학교에 가서 컴퓨터를 쓸 수 있느냐고 물어볼까도 했지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채팅을 하기가 무서웠어요.
엄마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유니세프 사무실에 가서 컴퓨터를 쓰고 오라고 허락해주셨어요.”
아직 아마존 유역이 어떤 곳인지 직접 보지 못했기에 RC가 사는 마을이 어떤 곳인지, 여기서 얼마나 먼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컴퓨터가 없다는 RC의 말을 듣고, 우리 아이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누구나 컴퓨터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저 당연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이들에게 전자제품은 절대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니까. RC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유니세프 사무실까지 가는 장거리 버스를 타려면 그날 엄마 점심값까지 탈탈 털어야 해요. 우리 집은 정말 가난하거든요. 아프신 엄마가 점심까지 굶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이 아파요.”
그때의 심정이 되살아났는지 잠깐 말을 멈추고 헛기침을 한 번 했다. 그러나 이윽고 RC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그래도 저는 갔어요. 정말 끝내줬어요! 인터넷 채팅방에 들어가서 저처럼 약물치료를 받는 아이들이랑 얘기를 나눴어요. 그 애들은 친구들한테 말했는지, 뭐라고 말했는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말이에요. 제가 경험했던 것을 똑같이 경험한 사람들이랑 얘기를 나누는 건 정말 신 나는 일이었어요.
저는 격주로 점심을 거르고 유니세프 지사를 찾아갔어요. 제가 느낀 모든 공포를 다른 사람들과 나눈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지금도 엄마 생각만 하면 마음이 너무나 아파요. 그렇지만 지금 저는 HIV 양성 판정을 받은 어린 친구들에게 조언을 하는 운동가가 되었어요. 요즘은 브라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변화시키기 위한 운동을 하고 있어요. 지금도 인터넷은 2주에 한 번씩밖에 하지 못해요. 워낙 차비도 비싸고 시간도 오래 걸리거든요.”
그 말이 끝나자, 아주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테이블 위에 있던 게임기와 전자제품들이 조심스럽게 눈앞에서 사라진 것이다. 헤드폰도 눈에 띄지 않았다. 엄마고 아이들이고 할 것 없이 다들 훌쩍거리고 있었다. 마침내 RC의 연설이 끝나자, 우리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그런 다음 정말 감동적인 일이 한 가지 있었다. 일행 중 한 엄마가 브라질로 출발하기 전에 미리 후원금을 기부했는데, RC와 만남이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이곳 직원이 새 컴퓨터를 준비해두었던 것이다. 그 선물을 받고, RC는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보고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더해졌다.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른 RC는 일행이 모인 자리로 다시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는 슬플 때만 울었어요. 하지만 난생처음, 기쁠 때 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어요. 오늘은 정말 기뻐서 운 거예요. 어떻게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약속할게요. 이 컴퓨터로 최대한 많은 아이가 인터넷을 접할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이들은 구름처럼 RC 옆으로 몰려가, 서로 껴안고 하이파이브를 나누었다. 그 소년의 이야기가 우리가 왜 이곳에 왔는지 귀에 못이 박이게 되풀이했던 어른들의 얘기보다 훨씬 더 감명 깊게 와 닿은 것이다. 드디어 뭔가 깨달은 모양이다. 그들 사이에서 아들 리의 눈을 본 순간, 이곳에 데려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3년 현재 RC는 스무 살 청년이 되었고, 여전히 자신의 약속을 지키며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 소식을 여러분에게 전하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HIV에 걸린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브라질 내 네트워크를 이끄는 대표직을 수행하고 있다.
그 단체는 브라질과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힘있는 청소년 단체로 꼽힌다. RC는 정기적으로 정부 지도자들과 만나면서 브라질의 청소년 정책을 수립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RC는 한 아이에 대한 투자가 얼마나 대단한 결실을 얻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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