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연극 ‘프라이드’는 ‘거대한 역사’와 ‘개인의 역사’를 교직한 직물이다. 동시에 소수자의 저항을 담은 연대기이고,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자전(自傳)이며, 애절한 멜로이자 아픈 삶을 위로하는 휴먼 드라마다.
이야기는 1958년과 2014년을 넘나들며 ‘필립’, ‘올리버’, ‘실비아’ 세 사람의 갈등, 고통, 희망을 담는다. 1958년의 필립은 아내 실비아의 소개에 의해 올리버를 만난다. 필립은 올리버에 대해 알 수 없는 끌림을 느끼고, 실비아는 두 사람의 묘한 기류에 불안해한다. 2014년 속 필립과 올리버는 연인이다. 올리버의 섹스 중독을 견딜 수 없는 필립은 그의 곁을 떠난다. 혼자 남은 올리버는 실비아에게 위로를 구하고, 실비아는 둘을 화해시키려 애쓴다.
이 연극, 촘촘하다. 물 한 방울 샐 것 같지 않은 꼼꼼한 바느질이 극 전체를 박음질한다. 작품은 1958년과 2014년이라는 다른 시대를 능숙하게 넘나들며 세 사람이 겪은 고통, 억압, 극복의 과정을 그려낸다. 동성애는 소재일 뿐이다. 이 작품 속 동성애자는 소수의 대표격으로 내세워진다. 하지만, 연극은 그들을 뛰어넘어 우리가 살아오며 받아왔던 박해, 침묵, 화해의 과정까지 어루만진다. ‘역사’라는 거대한 틀이 극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도 흥미롭지만, 그 안에서 섬세하게 ‘개인의 역사’까지 짚어내는 영리함이 빛난다.
연출은 상징적이고 은유적이지만 동시에 직관적이다. 예를 들어, 인물들의 테마곡은 동성애자 작곡가의 음악으로 사용된다. 무대를 장식하는 기둥은 동성애에 관용적이었던 고대 그리스의 신전 이미지를 끌어내고, 극 속 대사에 인용되는 ‘침묵의 신전’이라는 의미까지 자연스럽게 포용한다. 직설적으로 작품의 주제를 이야기하면서도 ‘메타포 찾기’의 재미까지 안겨주는 것이다.
1958년과 2014년의 살아가는 인물들의 교집합은 어떠한가. 1958년 동성애자로서 정체성을 깨달은 올리버는 자신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는 끝끝내 필립에게 거부당하고 상처받는다. 2014년의 올리버는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인정하는 자유로운 게이지만, ‘섹스 중독’에 빠져 있다. ‘섹스 중독’이란 또 하나의 상징은 그가 1958년 필립에게 거부당했던 상처와 존재론적 고독에 대한 표출이자, ‘영혼이 길을 잃은’ 그에 대한 은유로 다가온다.
연극 ‘프라이드’는 놓치고 싶지 않은 대사들이 유달리 많다. 원작 대본에는 없지만, 김동연 연출가가 추가했다는 ‘당신이 당신에게 닿을 때까지’를 비롯해 ‘우리에겐 이야기가 있어. 그건 역사가 있다는 거야’, ‘침묵이 당신을 죽이고 말거예요’,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등 가슴에 무늬를 새기고 싶어지는 명대사들이 줄곧 쏟아져 나온다. 배우들의 몸을 빌어 다시 태어나는 대사들의 감정과 울림은 영상으로 담아 가슴에 새김질하고 싶을 정도다.
우리는 자신에게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산다. 역사를 바꿀 의지도, 굳센 믿음도 없다. 젊은 세대들은 더욱 그렇다. 그들은 자신에 대해 침묵하며, 잿더미 속 사회에 묻혀 살길 기도한다. 이 작품은 말한다. 자신을 바라봄으로서 갖게 되는 ‘긍지’를 가지라고. 과거의 사람들이 싸워 이겨 쟁취한 현재의 자유를, 삶의 지금 이 순간을 제대로 누리라고 외친다.
실비아의 대사 중에는 이 모든 것들을 대변하는 말이 하나 있다. “이 세상에는 말야. 맨 처음 질문을 시작하고, 존재와 경계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리고, 그래서 스스로의 권리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 있어. 목숨을 걸고 말야. 이건 공원에서 아무랑 막 하고, 오뜨꾸뛰르 폭풍쇼핑할 그럴 권리를 위한 건 아니었잖아.”
연극 ‘프라이드’를 본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의 삶으로서, 나와 같은 시대를 공유한 이들에게 실비아의 대사를 빌어 한 마디 해주고 싶다.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모두, 괜찮아질 거예요.”
이 위로가 당신에게 닿을 때까지, 연극 ‘프라이드’가 오래도록 사랑받는 수작으로 우리의 곁에 남아있길 바래본다.
연극 ‘프라이드’는 11월 2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에서 공연된다. 이명행, 정상윤, 오종혁, 박은석, 김소진, 김지현, 최대훈, 김종구가 출연한다.
사진=백초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