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원으로 국경 넘기4] “한국이 네덜란드한테 5대0으로 졌어? 몰도바는?”

입력 2014-11-01 12:25  

▲ 몰도바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장면. 수도 키시네프 도로에서 말이 끄는 수레가 자동차를 끌고 가고 있다.(사진 = 이기호)


IMF가 한창이던 1998년 여름.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로 가는 길에 다뉴브강을 건넜다. 양쪽 강변에는 각국의 세관이 있었고 여행자들은 배로 국경을 건넜다. 그때 배삯으로 지불했던 돈이 미화 50센트, 우리 돈 500원이었다. 부다페스트에서 브라티슬라바로 가는데 사용된 전체 여행금액은 ‘달랑’ 4.5달러 정도였다.

‘500원으로 국경 넘기’는 2007년 데일리서프라이즈를 통해 연재된 기존 원고를 약간의 수정을 거쳐 다시 게재하는 코너다. 이기호 기자의 독특한 여행담을 소개하는 코너다. 몰도바, 터키-그리스, 헝가리-슬로바키아, 우즈베키스탄, 몽골, 한국의 독도 그리고 대통령 해외순방으로 따라나섰던 멕시코-코스타리카-미국 등 총 7차례의 여행경험을 매주 토-일요일 연재하며 분량은 여행지별로 차이가 있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색다른 여유를 느껴보자.(편집자)


체류기간이 길어서일까. 몰도바에서의 추억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유독 추억이 많다. 하지만 나름의 의미를 부여해서 다소 길게 끌어갔던 몰도바와 관련된 이야기는 이번 회를 끝으로 접으려고 한다. 개인의 경험이 폭넓게 공감받기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는 것 같다.

1998년 6월 프랑스월드컵이 열리던 당시 나는 월드컵이 진행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TV가 있었지만 러시아어와 몰도바어로 방영되는 프로그램에 당연히 별다른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가르치던 학생 녀석들이 우르르 아파트로 몰려와서 떠들기 시작한다. 한국이 네덜란드한테 5대0으로 졌다는 소식을 ‘친절하게’ 알려주려고 의도였다.

에이 설마~. 평소 하도 격 없이 지내던 놈들이라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개인적으로 마르코 반 바스텐과 루드 굴리트가 뛰던 시절 네덜란드축구대표팀을 좋아했던 나였지만 ‘오대빵’은 믿기 힘든 스코어였다. 게다가 IMF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국민에게 축구대표팀이 그럴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한 가닥 기대도 이 녀석들의 말을 불신하게 만든 요소였다.

마구 떠들던 녀석들 중 유독 믿을만한 친구가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사실이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사실이다”고 답한다. 다른 녀석들은 더 신나게 웃고 떠들고 난리를 피운다. 흠, 반격이 필요하다. 그래서 조용히 한마디 했다. “얘들아, 그런데 몰도바는 월드컵에 가본 적이나 있니?” 분위기는 조용해졌어야 했다. 내가 이겼어야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 The first male grammar school. built in 1837-1888. Architects Simko-Savoisky, G. Lonsky, V. Solovyov. Today, the State Historical Muzeum of the Moldavian SSR(Soviet Social Republic)(사진 = 이기호)


이 녀석들은 “러시아는 여러 차례 올라갔다” “루마니아가 지금 잘하고 있다”며 축구강국인 주변의 ‘혈연’을 들먹인다. 치사한 놈들. 그간 러시아, 루마니아 사이에서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이들에게는 우리의 ‘반일감정’ 같은 반감이 없었다. 독립은 했지만 여전한 유대감, 약소국의 국민으로서 강대국에 의지하고 싶은 심정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래, 내가 졌다.

“한국음식이 매워야 얼마나 맵겠어”하던 미국인 닉은…

코우셴 지역에서 나보다 유일하게 영어를 잘했던 미국인 닉은 미시건주립대 로스쿨을 다니다가 학비를 벌기 위해 몰도바로 온 청년이었다. 당시 월급이 7000달러 이상이었다. 대략 내가 받던 생활비의 35배였지만 그곳에서 생활은 비슷했다. 비자연장비나 월세, 학생들 간식비 등 빠듯했지만 나도 현지인들에 비해 약 10배의 수입이 확보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닉은 금발의 백인이었으며 키와 몸무게는 적당했다. 미국인들, 특히 일정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은 코카서스인종은 유독 지는 걸 싫어한다. 때때로 별 것 아닌 일에 목숨을 걸듯이 덤벼들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닉이 나를 집으로 초청하며 자기가 잘하는 피자를 대접하겠다고 했다. 대신 나에게는 한국고유의 음식을 준비해달란다. 김치를 기대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몰도바를 나올 때까지 한국인도, 김치도 구경 못하던 시절이었다. 미국에서 고추장과 된장을 각각 5kg씩 가져와 가끔 고추장볶음밥을 해먹던 나는 라면과 고추장볶음밥으로 승부수를 걸었다. ‘식객’도 아니고 TV 요리대결에 출연한 요리사도 아니지만 닉과 나 사이에는 묘한 승부의식이 싹트고 있었다. 그래? 그럼 한미간 국가대항전 한 번 붙어볼까.

닉의 아파트를 방문했다. 채식주의자인 나를 위해 닉은 야채피자와 치즈피자를 열심히 구웠고 맛은 담백하고 괜찮았다. 내가 열심히 먹고만 있자 그는 눈치를 줬고 나는 할 수 없이 라면과 볶음밥을 만들기 시작했다. 라면스프는 절반도 넣지 않았고 빨간색이어야 할 볶음밥도 옅은 주황색일 정도로 싱겁게 만든 요리였다. “원래는 더 ‘hot’하다”고 귀띔하긴 했다.

“멕시칸 음식도 잘 먹었다”며 호언장담해온 닉은 초반 “괜찮다, 맛있다”며 제법 버텼다. 하지만 하얀 얼굴은 점점 붉어져갔고 결국 혀를 내밀며 찬물을 찾았다. 이겼다. 나는 낄낄거렸다. 그래도 한국음식의 매력은 어쩔 수 없나보다. 내가 몰도바를 떠날 때 닉은 아파트까지 찾아와 남은 고추장과 라면을 쓸어갔다. 지금은 변호사가 됐을까. 가끔 닉이 생각난다.

▲ The A.S.Pushkin State Academic Opera and Ballet Theatre. Built in 1980(사진 = 이기호)


한국인 배고플까봐 매일 음식 챙겨주던 ‘넉넉한’ 극빈자들

몰도바의 정신적 지주는 스테판 셀 마레. 전국에서 그의 동상을 흔히 볼 수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아무르티무르나 우리의 광개토대왕, 세종대왕에 해당한다. 수도 키시네프에 있는 공원에서는 그곳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알렉산더 푸쉬킨(Alexander Pushkin)과 몰도바에서 태어난 루마니아의 대표시인 미하이 에미네스쿠(Mihai Eminescu)의 동상을 볼 수도 있다.

남성은 고교 졸업 후 사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상대적으로 여성의 대학진학율이 높았다. 몰도바에 도착한 첫날 방문한 집도 의대2학년에 재학 중인 큰 딸이 고졸사업가인 20대 초반의 남편과 결혼해 의아했던 일이 있었다. 게다가 그 딸이 예뻤던데 반해 남편은 별 볼품이 없어 보였다. 키도 여성이 큰데 반해 남성은 우리도 해볼 만한 ‘만만한’ 수준이었다.

몰도바는 수도 한복판에 말이 끄는 수레와 이 수레에 끌려가는 고물자동차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이즈음 동유럽에서 볼 수 있는 ‘새 자동차’는 대부분 한국브랜드였다. 한 번은 키시네프에 웬일로 깨끗하고 귀여운 새 차가 있어서 봤더니 현대에서 생산된 아토스였다. 1997년 7월 한국을 떠날 때까지 보지 못했던 모델이라 한참 서서 차 안팎을 살펴본 일이 있다.

회색빛 도시, 썰렁한 공항의 작고 낡은 비행기들, 따뜻한 흑해연안에서 털모자를 쓰며 모스크바를 흉내 내고, 군대에서 배운 어설픈 태권도 발차기만으로도 감동해 엄지를 치켜세우는 사람들. 환전하면서 집시들에게 소매치기를 당하기도 했고, 이 장면을 그냥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는 경찰에 짜증난 적도 있지만 몰도바에 대한 추억은 대부분 긍정적이다.

‘개발독재식 사고’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에게 전체인구의 75%가 절대빈곤상태에 놓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느긋하고 ‘객관적으로 게을렀던’ 몰도바는 분명 생소한 나라였다. 하지만 몰도바인들은 너무 착했다. 자기 마을의 유일한 한국인이 배고플까봐 쌓아놓고 제대로 먹지도 못할 음식을 매일 가져다주던 따뜻한 마음은 두고두고 갚아야할 마음의 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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