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각 광해군과 사도세자 시대를 그린 드라마 ‘비밀의문’과 ‘왕의 얼굴’(사진 = SBS, KBS) |
‘왕의 얼굴’은 광해군 시대를, ‘비밀은 문’은 사도세자를 그리고 있다. 이미 영화 ‘광해’가 광해군를 그려 천만 관객을 동원했고, 내년엔 사도세자를 내세운 사극 ‘사도’가 개봉될 예정이다. ‘무사 백동수’에서도 사도세자가 중요한 역할로 등장했었다.
이렇게 우리 대중문화계가 광해군과 사도세자를 부각시키는 것은 그때가 조선 역사상 가장 아쉬웠던 시기 중 하나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서인의 반정에 의해 밀려난 임금이다. 만약 광해군이 반역을 진압하고 계속 집권했다면 훗날 병자호란의 치욕이나 노론이 패악도 없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광해군이 서인에게 밀려나면서 서인 전성시대가 열리게 되고, 그 서인에서 노론이 나오며, 조선 후기에 노론 일당독재가 펼쳐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광해군 시대를 아쉬워한다.
서인 집단은 현실적인 국력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청나라에 맞서 싸울 준비도 하지 않은 채 반청이라는 구호만을 외쳤다. 그것은 성리학적인 명분론과 함께 서인 지배집단의 기득권이 숭명사대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청나라가 마침내 조선을 침공했을 때 조선은 아무런 저항도 못하다가 도성을 함락당하고 말았다.
백성들이 간난의 고초를 겪었다. 서인지배세력이 명나라의 장수 모문룡을 비호했기 때문에 그의 패악질에 고통을 당했고, 호란 이후엔 수많은 백성들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국가간 교섭을 통해 그 백성들을 귀환시켜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집권 사대부들은 제 가족 먼저 구해오겠다며 개인적으로 큰 몸값을 제시해 포로 몸값을 폭등시켰다. 그 바람에 일반 백성들이 가족을 찾는 것이 더 어려워졌다. 사대부들의 잘못된 정책으로 전화를 당하고 그 후유증까지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전가됐던 것이다.
호란 이후 청나라는 중국 왕조 역사상 몽골제국 시기를 제외하곤 최전성기를 맞이한다. 당시 청나라는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나라였다. 서인 사대부 지배세력은 그런 청나라를 상대로 북벌이라는 황당한 정책을 펴며 여전히 숭명사대 노선을 지속했다. 자신들이 섬기는 나라를 바꾸면, 혹시 조선 내의 노비 상민들이 지배층을 바꾸겠다며 들고 일어날까 하는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자기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국가정책을 황당한 방향으로 이끈 셈이다. 광해군이 밀려나지 않았다면 이런 역사의 행로가 바뀔 수도 있었을 거라는 기대가 있다. 바로 그래서 광해군 시기에 아쉬움이 큰 것이고 대중문화가 그런 대중정서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서인에서 분화된 노론은 영조 등극과 함께 집권했다. 사도세자가 그런 노론정권을 적대시하며 다른 정파를 가까이 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인식이 있다. 만약 사도세자가 죽지 않고 그대로 살아 노론을 제대로 견제했다면, 훗날 노론의 폭주가 없었을 수도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조선 후기에 노론이 폭주하면서 한민족의 고통스런 근대사로 이어졌고, 그 질곡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사람들은 여긴다. 서인-노론 지배집단이 보여줬던 무책임하고 탐욕스런 행태에서 현재 우리 지도층의 모습을 보기도 한다.
광해군이나 사도세자는 이런 역사 흐름을 바꿀 수도 있었던 위인이라고 사람들이 느끼기 때문에 그 시기에 큰 아쉬움이 나타난다. 따라서 설사 이번 드라마들이 실패한다고 해도, 광해군과 사도세자는 앞으로도 계속 우리 대중문화계에서 조명 받을 것이다.
하재근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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