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식 칼럼] ‘빛나거나 미치거나’ ‘순수의 시대’ 대중문화는 비적통 캐릭터가 접수?

입력 2015-03-07 10:58   수정 2015-03-08 18:13

▲ 영화 ‘순수의 시대’에서 정도전을 무너뜨리는 빌미를 제공하는 가상의 인물 김민재(신하균 분)는 기녀 가희(강한나 분)에게서 난생 처음 지키고 싶은 제 것을 발견한다.(사진 = 영화 ‘순수의 시대’ 스틸컷)


영화와 드라마는 적통이 아닌 이들이 주요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을 다룬 작품의 주인공들에게서 더욱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MBC 드라마 ‘빛나거나 미치거나’의 광종(장혁 분)은 본래 고려 태조 왕건의 넷째 아들이다. 그는 고려의 4대 임금이었는데, 태조 왕건과 그의 아들이 4대에 걸쳐 왕위를 이었던 셈이다. 광종은 이복형 혜종과 동복형 정종 등 광종의 윗형제들이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가능했다. 광종의 형들이 천수를 누렸다면, 적어도 정종이 천수를 누린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그는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 태종 이방원은 셋째 아들로 결국 정도전을 제거하고, 아버지 태조 이성계를 명령을 어기며, 정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처음부터 이방원은 왕위를 노리는 인물로 묘사가 되지만, 다섯째 아들이 왕위를 생각한다는 것은 쉽지 않을 일이었다. 워낙 많은 작품에서 이같은 태종의 이야기가 다뤄졌기 때문에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이런 점은 개봉 영화 ‘순수의 시대’에서도 다뤄졌다. 이 영화에서는 정도전을 무너뜨리는 빌미를 가상의 인물인 김민재(신하균 분)와 그의 아들에서 찾았다. 태조의 사위로 설정된 그 아들의 불륜 사건을 등장시켰다. 이방원은 아들과 아비의 강상죄를 꾸미고, 이의 은폐를 위해 정도전과 김민재의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모함해 그들을 제거하기에 이르렀다. 역사적 근거는 없다. 물론 1400년,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이 왕위에 등극했다. 그 다음 왕위도 첫째가 아니라 셋째 충녕대군 세종이 이었다.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는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김영철 분)와 그의 딸(문채원 분)을 중심에 두고 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그냥 왕가의 여성이었을 세조의 딸은 어느 날 갑자기 왕위에 오른 아버지로 인해 공주의 신분이 된다. 이 때문에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이들이 일어난다. 영화 ‘관상’에서 세조의 이야기는 좀 더 권력적 흥미를 강화하기도 했다.

KBS 대하사극 ‘징비록’에서 조선 임금 선조(김태우 분)는 방계혈족 출신의 왕이었다. 적장자 계승의 원칙이라면, 선조는 절대로 왕이 될 수 없었다. 선조는 아마도 적장자를 세자에 세우려 했을 법하다. 그러나 현실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영화 ‘광해’와 드라마 ‘왕의 얼굴’의 주인공 광해군은 서자에다가 차남이었다. 적장자가 오히려 대중문화 속에서는 잘 등장하지 않는다.

SBS 드라마 ‘비밀의 문’에서 사도세자(이제훈 분)은 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잇지 못한다. 오히려 사도세자 이야기는 정조의 스토리에서 더 잘 등장한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왕위에 있지 못했음에도 임금의 자리에 오른다. 많은 작품에서 정조는 끊임없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상처와 후유증 때문에 고통 받으면서도 이겨내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이렇게 드라마와 영화에는 원래 왕이 될 수 없었던 인물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런 인물들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원래 왕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평이하다. 당연하게도 원래 왕이 될만한 사람이 왕이 됐기 때문에 스토리가 밋밋하다. 교훈이나 메시지도 없으며 감정 이입할 만하지도 않다.

반대로 왕이 될 수 없던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그들은 자신을 옭아맨 정해진 운명을 벗고, 새로운 삶을 만들어낸다. 물론 과장이 강한 경우도 있지만 이런 캐릭터들의 특징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나가고, 싶은 현대인들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

이런 캐릭터는 극적인 스토리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흥미를 자극하기도 한다. 왕이 되는 과정도 힘들지만, 왕이 되고 난 이후에도 주인공의 삶을 위협하는 요인이 바로 비적장자라는 태생적 신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결론이 이러한 위기를 대개 극복해내는 주인공일수록 사람들의 선호와 지지를 받아낸다.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마치 스스로 극복해내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비록 찬양할 수 없는 그들이 악당이라도 말이다.

앞으로는 어떨까.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층이 고착화될수록 이러한 양상은 더욱 빈번해질 수 있다. 운명적인 굴레가 강하게 작용할수록 대중문화에서는 반대의 세상을 염원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장자가 아니며 더구나 운명의 굴레를 넘어야 자신의 꿈을 사회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출발선이 다른 사회가 고착된다는 것은 과거의 신분질서의 적장자 계승체제로 돌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과거를 배경으로 한 인물들이 부각되는 것이겠다. 다만, 실제 역사적 사실과 실존 인물일수록 더욱 현실적 설득력을 갖게 될 것이다. 가공의 인물보다는 실제 현실에서 무엇인가 실현을 했던 사람이 각광받는 이유는 아무리 조악하거나, 악당이라고 해도 운명에 ‘도전’을 했기 때문이다.

‘도전’은 말이 쉽지만 때로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이 다분하기 때문에 더욱 인정을 할 수밖에 없다. 세상이 엄혹해질수록 자신의 도전을 극단적으로 치달아야 하며, 그러한 상황은 경쟁이 심화되는 21세기에는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다. 대중문화를 이를 항상 투영해낼 것이다.

그러나 좌절된 주인공들의 꿈만을 그려낸다면 호응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고 애써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악당으로 묘사된 인물들이 사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악당으로 그려졌던 광해군의 이미지 변화를 반추하면 좋을 것이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동아방송예술대학 교수)

※ 외부 필진의 의견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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