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에 홀린 걸까. 아니면 오묘한 경계의 환상에 갇혀 휘말린 걸까. 서울예술단 가무극 ‘이른 봄 늦은 겨울’은 일찍 피어 찰나에 사라지는 매화의 흔적을 탐한 작품이다. 현실을 토로하지도, 그렇다고 환상만을 뒤쫓지만도 않는다. 그저 이른 봄 늦은 겨울의 경계에 피어오른 매화의 환영들을 찰나라도 붙들어보려 진력할 뿐이다. 동시에 이 작품은 ‘함께 꾸는 꿈’이 아닌 ‘환상의 나눔’을 지향한다.
가무극 ‘이른 봄 늦은 겨울’의 시작은 어느 한 갤러리에서다. 갤러리 한가운데에는 매화나무 가지 하나가 달항아리에 담겨 오도카니 섰다. 주변에는 매화 그림들이 이리저리 걸려 있고, 인적은 갤러리를 정리하는 스태프와 경비뿐이다. 이윽고 어두운 밤, 불이 꺼지면 매화 꽃송이만큼이나 호젓하고 구슬픈, 어여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작품은 줄거리가 없다. 매화라는 하나의 주제로 마인드맵을 그리듯 다양한 상념들을 하나씩 무대 위에 꺼낸다. 마치 배삼식 작가가 조금씩 쟁여놓은 ‘매화 이야기 보따리’들을 단편 연작시집처럼 하나씩 펼쳐보는 느낌이다. 총 에피소드는 11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더하면 총 13개의 에피소드가 90분간 무대 위에서 느긋하거나 흥겹게 펼쳐진다. 극 전체의 분위기는 나긋하지만, 무대 위에서 움직이는 배우들의 걸음 재고 경쾌하다.
이번 공연은 서울예술단이 근래 선보여온 작품 중 가장 신선한 시도와 새로운 시도가 엿보인다. 작품은 서사를 과감히 내려놓고, ‘풍류’ 그 자체에 몰두한다. 이야기를 들려주기보다 흥을 함께 나누는 일에 가깝다. 장면 마다 등장하는 소재와 표현 방식도 제각각이다. 출연진은 탈춤을 추며 랩을 하기도 하고, 매화에 얽힌 인물들의 일화를 마치 만담처럼 풀어내기도 한다. ‘매화 그리고 휘파람새’ 장면에서는 젬베, 기타, 멜로디언 등의 악기가 등장해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가무극 ‘이른 봄 늦은 겨울’은 각 에피소드가 짧은 호흡으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인지 유독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장면들이 많다. ‘달, 항아리와 여인과 매화’ 장면은 여성 무용수들의 소박하지만 유려한 몸짓에 남자 배우들의 내레이션이 덧대어진다. “달의 꿈, 항아리의 꿈, 여인의 꿈, 매화가 여자인지, 여자가 매화인지” 등의 대사가 휘몰아치는 가운데, 달항아리를 들고 종종거리며 춤을 추는 여성무용수들이 첨예하지만 유연하게 조화된다. ‘조매-이상한 꽃나무2’는 배우 모두 각자 하나씩 인형을 들고, 다양한 삶의 순간들을 표현한다. 이들은 싸우기도 하고, 화해하기도 하며, 다시 끌어안거나, 밀쳐 내기도 한다. 짧지만 강력한 표현들이 몸을 겹치며 관객에게 거대한 감정의 파도를 일으키게하는 명장면이다.
작품은 연극이나 뮤지컬보다는 ‘무용의 작법’으로 써내려간 작품이다. 연극은 주로 대사를 통해 ‘의미’와 ‘서사’를 만든다. 반면 무용은 움직임을 통해 사색의 ‘공간’을 생성한다. 작품은 적은 대사와 노래로 배경을 만들고 그 위에 무용을 덧씌운다. 움직임과 움직임 사이에서 만들어진 ‘사색의 공간’들은 관객들을 ‘매화로 빚어진 환상의 세계’에 초대한다.
무대는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네 개의 세트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활용한다. 무대의 정점을 찍는 것은 영상과 조명이다. 서울예술단은 최근작에서 다양한 영상 이미지들을 활용해 시공간을 넘나드는 장면을 묘사해왔다. 가무극 ‘소서노’에서는 신화의 세계를, ‘푸른 눈 박연’에서는 바다의 이미지를 무대 위로 불러냈다.
이번 공연 역시 마찬가지다. 가무극 ‘이른 봄 늦은 겨울’에서는 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닌 ‘경계의 세계’를 영상과 조명으로 구축해냈다. 세 번째 에피소드인 ‘나부춘몽’에서는 눈보라 영상과 배우들의 움직임만으로 실감나는 등반 장면을 만들었고, 장면과 장면 사이에는 불규칙적인 선들의 이미지를 영상으로 배치해 몽환적인 ‘상념의 끈’을 이미지화했다. 특히 열한 번째 에피소드인 ‘매화우’에서는 매화나무가 열매를 맺기까지의 과정을 한 연인의 사랑이야기에 빗대어 놓은 한 편의 일러스트를 보는 듯했다.
가무극 ‘이른 봄 늦은 겨울’은 생각의 빗장을 풀어놓아야 더 즐거운 작품이다. 해석하려 들면 외려 작품의 향취가 더 멀어지기 때문이다. 관객은 배삼식 작가가 꾸려놓은 이야기에, 임도완 연출가가 살림을 살아놓은 무대를 매화나무 아래 꽃향기 맡듯,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꽃잎 구경하듯 버려두고 보면 된다. 그렇게 나누어지는 환상들을 하나둘 받아두기만 하면 ‘겨울이지만 봄’인 이 작품의 진가를 만날 수 있다.
전체적으로 가사가 잘 전달되지 않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양한 볼거리들이 눈을 사로잡아 지루할 틈은 없지만, 배삼식 작가의 내공이 담긴 가사를 극장 내에서 즐기지 못한 것은 서운한 일이다. 또한, 단편적인 에피소드가 13개나 이어지다 보니, 짧은 러닝타임에도 극이 다소 길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서울예술단은 이번 공연으로 ‘서울예술단만이 할 수 있는 서울예술단’ 다운 무대를 보여 줬다. 국내 예술단체 중 이토록 다양한 분야가 화합하는 무대를 자력으로 해낼 수 있는 단체가 과연 있을까. 참여한 서울예술단 단원들의 기량도 놀랍다. 극의 무게 중심을 잡아준 고미경, 정유희, 최정수, 김백현, 오현정을 비롯해 함께한 10명의 단원들도 움직임, 노래, 연기에서 빈틈없이 없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동고동락한 단원들의 끈끈한 유대가 말 없는 호흡으로 작품을 더욱 단단하게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