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서연 역으로 주목받은 수지(사진 = 영화 ‘건축학개론’ 스틸컷) |
영화 ‘건축학개론’에서는 젊은 청춘이 등장하지만, 결국 그들은 과거 속에만 존재한다. 그리고 시간이 훌쩍 흘러 현재의 인물들로 회귀한다. 그들은 이미 청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청춘은 이미 나이가 들었다.
영화 ‘쎄시봉’에도 청춘은 등장하지만, 그들이 살아있는 공간은 지금이 아니라 1970년대에 머물고 만다. 청춘이라고 하기에는 현재 그 인물들은 과거의 기억에 갇혀 있다. 현재로 돌아온 주인공들의 중년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들이었다.
영화 ‘수상한 그녀’에서는 주인공이 젊은 20대 청춘으로 돌아가버렸지만 그것은 육체적인 상태만 그러할 뿐, 그녀가 사는 공간은 현재일 수 없었다. 청춘이 왔지만 진정한 청춘이 오지 않았으니 현재의 청춘이 공감하기에는 한계가 분명했다.
텔레비전 드라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단적으로 ‘응답하라 1994’의 주인공들은 청춘의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결국 그들의 청춘은 과거의 이야기에 머물 뿐이었다. 현재에 등장하는 그들의 모습은 과거의 모습인데 마치 하늘의 별이 이미 과거의 별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텔레비전에는 청춘드라마가 없어진지 오래다. ‘우리들의 천국’이나 ‘내일은 사랑’같은 청춘드라마의 부활을 끊임없이 요구하지만, 부활은 쉽지는 않았다. 드라마 학교 시리즈는 그나마 10대들의 이야기를 다루고는 있지만, 결국 고등학교를 벗어나지 못했다.
‘남자 셋 여자 셋’과 같은 시트콤의 부활도 쉽지 않았다. ‘순풍산부인과’와 ‘지붕 뚫고 하이킥’과 같은 가족형 시트콤이 한동안 유지되다가 지상파에서 그 생명력을 유지기는 쉽지 않다. 시도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시트콤 ‘뱀파이어 아이돌’은 매체를 잘못 만난 탓인지 생명력을 오래 갖지 못했는가 싶기는 하다. 해당 방송사는 애초의 기획의도와는 결별하고 아예 젊은 청춘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들을 더 이상 만들지 않았다. ‘룸메이트’같은 예능 프로그램에도 청춘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의 실제 현실과 일상을 담아내기보다는 설정된 공간 안에서 제한된 모습만을 드러낼 뿐이라는 한계만 갈수록 노출할 뿐이었다.
청춘 문화 콘텐츠라고 하면 대개 대학생들이 등장한다고 생각하기 쉽고, 그렇게 만들어졌다. 마치 대학가요제가 청춘을 대변하는 듯이 말이다. 청춘이 곧 대학생이라고 규정한다면 그 경계에 있는 이들이 배제돼버린다. 또한 대학생 전이나 즈음의 청춘들은 소외되기 마련이다.
▲ 청춘은 곧 대학생이라는 고정관념을 탈피한 영화 ‘스물’(사진 = 영화 ‘스물’ 스틸컷) |
이러한 점을 영화 ‘스물’이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반드시 대학생일 필요는 없었다. 영화는 세 명의 친구, 그리고 각각의 캐릭터를 통해 인생의 길에 나서는 청춘을 자화상을 보여준다. 모든 청춘들이 대학생이 아니며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목적을 세운 것도 아님을 보여준다.
정처 없이 부유하는 삶이 있고, 제도권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분투하는 청춘도 있다. 당연히 자유로운 예술가적 삶을 추구하는 주인공도 있을 법하다. 그들의 삶을 낭만화하기도 아주 우울하게 그릴 필요도 없는 그냥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일이 필요하면서 그들의 고민과 즐거움을 드러내주는 문화콘텐츠가 언제나 필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문화콘텐츠가 확실하게 타깃층을 구축할수록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점이다. 많은 관객들을 인위적으로 불러 모으려 할수록 구심력이 사라져서 뒷심을 발휘할 수 없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장르적 그리고 역량적 한계를 분명히 확인하고, 이에 맞는 콘텐츠를 제작하는 것이 더 본래의 목적에 부합할 수 있다. 예컨대 영화 ‘스물’처럼 확실하게 타깃을 정할수록 그 대상의 욕망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이를 통해 호응을 열렬히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동아방송예술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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