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연극 ‘소년B가 사는 집’은 14살에 살인을 저지른 한 소년이 복역 후 집으로 돌아오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다. 작품은 가해자와 가해자의 가족이 사건 후 맞닥뜨리는 일상을 조용히 관조한다. ‘용서하라’ 혹은 ‘미워하라’고 편들지도 않고, 살인을 저지른 소년을 ‘나쁘다’ 혹은 ‘어쩔 수 없었다’고 전제하지도 않는다. 그저 이유 없는 불행 이후 그들이 마주하게 되는 일들을 나지막이 들려줄 뿐이다.
연극 ‘소년B가 사는 집’은 그간 대부분의 이야기가 피해자에 초점을 맞췄던 것과 달리 가해자의 상황을 조명한다. 연극은 옳고 그름을 판별하지 않는다. 대신 지독한 불행을 눈앞에서 겪은 한 가족의 모습을 통해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는 삶의 발버둥을 고요한 울림으로 담아낸다.
고로 이 연극은 불편하다. 소년의 잘못은 피해갈 곳 없이 적확하다. 하지만 가엾고 딱한 것도 사실이다. 소년이 저지른 하룻밤의 실수는 삶의 목덜미를 긋고, 가족들의 숨통마저 틀어쥔다. ‘용서를 구하는 것조차 위선’이 되어버린 이들 가족 앞에서 관객은 불편하고 수상한 감정 속에 서성거리게 된다. 하지만 연극은 문제의 한 가운데에 정좌한 채 미동도 없이 먼 과녁을 가만히 응시한다. 여전히 초점은 흐리고, 명확한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작품은 맞출 수 없는 과녁을 기를 쓰고 바라보는 데 온 힘을 쏟는다.
‘살기 위해’ 각기 다른 방식을 선택한 가족들의 모습은 처연하다. 엄마는 외부와의 차단을 통해 아들인 대환을 보호하려 한다. 동시에 상황을 외면하려 한다. 그녀는 걸려오는 전화도 받지 않고, 보호관찰관이 집을 찾을 때도 마주치는 것을 피한다. 하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일상의 평범을 돌려받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옆집으로 이사 온 임산부가 남기고 간 떡 접시에 어떤 것을 담아 돌려줘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은 그녀가 얼마나 일상을 그리워하고 있는 지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아버지는 반대다. 그는 아들이 예전의 착하고 순수했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대환에게 정비사 자격증 공부를 시키거나, 보호관찰관의 고장 난 차를 고치러 혼자 보내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아이들은 믿어주는 것만큼 크는 거 아닌가요’라는 대사는 그의 순진한 믿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대환의 누나인 윤아는 외부 세계와 가족의 경계에 서 있는 인물이다. 가족이 평범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에 지나칠 정도로 밝게 행동한다. 얼핏 오버스럽지만 그 이면에는 가족이 구원받길 원하는 간절함이 배어있다. 이들 가족의 서로 다른 행태는 일상적인 행동에서조차 묘한 이질감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주변 인물과의 대비로 이야기의 깊이감을 조성하는 데 한몫을 한다.
반면 사건의 핵심에 서 있는 대환은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다락방에 웅크려 있거나, 주변의 눈치를 보며 자신을 바닥까지 낮출 뿐이다. 가족의 눈조차도 마주보지 못하는 대환은 마치 스스로에게 벌을 주려는 사람처럼 보인다. 여기서 기시적인 것은 비단 두려움이 우리의 몫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환은 보호관찰관이 함께 눈을 피하기 위해 건넨 우산에서조차 어깨를 나란히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저를 많이 무서워하나요?’라는 물음에도 비슷한 의미의 전류가 흐른다. 이는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는 만큼, 그 역시 사람들을 두려워한다는 반증이다. 대환의 정체된 행동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느낄 공포심과 자신이 타인에게 느끼는 죄책감의 반작용인 셈이다.
대환이 폭설에 갇혔던 임산부를 집까지 데려다 주는 장면은 스릴러적 긴장감마저 감돈다. 대환은 보호감찰관의 차를 고쳐주고 돌아가던 중 임산부를 차에 태운다. 임산부는 대환이 소문의 ‘소년’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과거의 이야기들을 마구 떠들어 대고, 대환의 엄마를 자신이 진행하는 ‘부모 교육’ 프로그램에서 제외해야겠다고 말한다. 타인으로부터 처음 자신과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 대환의 손은 운전대 위에서 창백하게 떨린다. 임산부의 말은 갈수록 과격해지고, 대환의 꽉 쥔 두 손도 격렬해진다. 이즈음 이르면 관객은 한때 그의 손에서 날뛰었던 폭력이 다시 한 번 도질까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결국 대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는 엄마 잘못이 아니라고, 다 왔으니 내리라고 손을 내밀 뿐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임산부의 차가운 비명만이 돌아온다. 내 옆에 앉은 사람의 과거 살인 사실을 알게 됐다면, 누군들 그렇게 하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허공에서 흔들리는 대환의 빈손이 안타깝지만, 동조해 줄 수는 없는 까닭이다.
우리는 살면서 자신의 과거에 갇힐 때가 있다. 지난 사실에 얽매여 자신의 현재를 아무도 봐주지 않으려 할 때다. 대환의 또 다른 자아이자 그의 눈에만 보이는 ‘소년B’는 바로 대환의 ‘지난 사실’이다. 외부의 사람들은 모두 현재의 대환을 통해 과거의 ‘소년B’를 바라본다. 대환이 늘 두려워했던 것도 바로 이 지난 사실에게 자신을 넘겨주는 일이다.
‘소년B’는 대환에게 말한다. “엄마랑 아빠가 기억하는 것도 나고,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도 나야. 난 여기 기억으로 증거로 남아 있는데, 넌 뭐야?” 대환의 두려움은 이 대목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사람들이 자신을 통해 과거의 ‘소년B’를 바라보는 것. 결국, 대환은 자신의 실존을 증명하기 위해서 ‘소년B’, 즉 과거를 뛰어넘어야 하는 상황에 처해진다.
작품은 과거가 현재를 점령하려 하는 일련의 과정을 대환과 ‘소년B’라는 환상을 통해 극화한다. 두 존재는 온 무대를 누비고 다투며 치열한 자아의 싸움을 현실로 불러올린다. 과거로의 회귀를 원하는 ‘소년B’의 유혹은 매섭고 달콤하지만, 대환은 그에 맞서 자신의 목에 체인을 건다. 대환은 병원에서 깨어난 후,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면서 버스정류장에 서 있던 한 노파에게 대뜸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어렸을 때 사람을 죽였어요!”
대환의 고백은 구원을 향한 하나의 의식처럼 비춰진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함으로서 ‘자신을 스쳐지나간 불행’을 받아들이는 데 성공한다. 이어 대환은 속죄를 위해 피해자의 가족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 떠난다. 용서를 받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 대환은 ‘그렇게 했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결국, 앞서 겪었던 과정들은 그가 ‘소년B’가 아닌 ‘대환’으로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의식인 셈이다.
대환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 피해자 가족의 용서를 바라는 것 또한 엄마의 말처럼 ‘사치이자 위선’일지 모른다. 하지만 대환은 가야한다. 더 이상 ‘소년B’가 아닌 자신으로 사죄하기 위해서. 터무니없는 혹은 이유 없는 불행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쩌면 이 연극은 우리에게 성장의 과정을 극한의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운동선수의 단단한 근육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훈련을 통해 생겨나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