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은 인생이고 인생이 바로 오늘인데, 오늘만큼 심각한 것은 없다. 하루하루가 치열한데 그 치열함에 대한 이야기까지 치열하게 할 필요가 없다. 심오한 이야기를 심오하게 듣고 싶은 사람은 없다. 나의 심각한 오늘을 흥미롭게 이야기해 주는 게 연극의 소명 중 하나이다.
변신의 공간으로서의 물
매년 여름 바다 근처 숙소는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도시를 떠나 휴가를 즐기러 온 사람들이 찾는 휴양지 중 가장 인기 있는 곳이 바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 원하는 힐링은 ‘물놀이’ 인 듯하다. 사람들은 물놀이를 할 때 자아를 내려놓는다. 나이가 지긋한 사람도, 지위가 높은 사람도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떠들고 물장구를 친다. 실제로 물속에 들어가면 중력의 원리에 따라 걸음걸이의 보폭도 더 크게 해야 하고 동작도 크게 해야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에 조금은 과장된 몸짓과 말투를 구사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물에 들어가서 아이처럼 변하는 이유를 중력의 원리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속은 실재하는 공간이면서도 새로운 공간이다. 모든 게 똑같은 형태로 보이면서도 물 안에서의 빛의 굴절 때문에 왜곡되어 보이기도 하고, 물 안에서는 가볍게 뛰어도 더 높이 점프를 할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부여받는다. 그게 물이라는 공간이 거는 놀라운 마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물속에서 더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이른바 ‘변신’이다.
무대에 등장한 수영장
연극 ‘변신 이야기’에서도 신화의 인물들이 물을 통해 변신을 하고, 이를 핵심으로 극이 전개된다. 작품은 인간과 신, 갈등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 열 개의 신화와 두 개의 작은 에피소드가 주를 이루는데 인물의 정서와 행동은 물 안에서 극대화 된다. 따라서 이 작품의 가장 핵심이 되는 이미지는 물이다. 무대 전면에는 수영장을 연상케 하는 작은 물 주조가 설치되어 있다. 인물들은 이 수조 안에 들어가서 행동하고 변화한다.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자주 활용되는 원초성
작품이 다루고 있는 이야기가 신화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인물들은 무채색의 옷을 입고 등장해 많은 이야기를 스스로 하지는 않는다. 대신 각 신화마다 내용을 설명하는 스토리텔러를 배치해두고 이야기의 흐름이나 설명은 그에게 일임한다. 그렇기 때문에 물이라는 공간이 가지는 마법과 그러한 공간에서 일상보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배우들을 보고 있노라면 원초적이기까지 하다. 게다가 인물들이 입은 무채색의 의상 또한 이러한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한 몫을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점은 모든 내러티브의 모태가 되는 신화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생소해서 더 알고 싶은 신화
신화는 서양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다. 창작된 지 오랜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현대의 관객들에게는 굉장히 생소하다. 신화가 가진 이러한 진입장벽 때문에 대중들은 신화를 접하고자 해도 쉽사리 접하게 되지 않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신화는 모든 이야기의 근원이 되는 에피소드를 모두 담아내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인간의 정서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을 사는 대중들도 신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는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이유들 때문에 신화는 아직 대중에게 낯설게 느껴진다. 따라서 전 세계의 창작자들이 신화를 쉽게, 자신의 정서와 정체성에 맞게 각색하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도전 과제의 실현 가능성
연극 ‘변신 이야기’는 스토리텔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을 택한다. 때문에 극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한 정보 이외의 부분은 대사가 아닌 다른 요소들로 채워야 하는 측면이 강하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는 약화된 대사의 자리에 음악을 채워넣는다. 무대 전방 후면 아래 공간에는 세션이 배치되어 라이브로 음악이 연주된다는 점 자체가 소위 ‘음악에 힘을 주었다’라는 강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번 공연에 출연한 세션은 국악계의 인기 밴드인 ‘고래야’이다. 고래야는 국악기를 기반으로 하여 각 나라의 토속 악기를 활용한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며 세계 무대를 누비는 팀이다. 실제로 연극, 즉 한국에서 무대에 올라가는 수많은 공연들에서 한국 문화로 대변되는 국악과의 콜라보레이션은 수차례 시도되고 있다. 이러한 한국 문화와의 결합은 한국 국적을 가진 예술가들이라면 자신의 정체성과의 문제와 맞물려 한번쯤 도전해보려 하는 과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칭찬을 들을만한 작품이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작품은 신화에 대한 쉬운 이해와 한국적 정서를 이입하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만일 인물의 말들로 신화의 이야기를 모두 담아내려고 하거나 한국적 색채를 가미하고자 기존에 널리 알려진 국악 곡을 전통적인 연주방식을 활용하여 단발적으로 아무 곳에나 삽입하였다면 이 공연은 ’짬뽕‘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신화가 전달하는 메시지를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최소화 하면서 한국적 색채의 표현 또한 새로 작곡된 ’한국적 음악‘을 사용하였다.
음악의 구성 방식 또한 특징적이다. 작품은 몇 개의 곡을 맥락 없이 끼워 넣어 음악의 존재감이 없으면서도 극적 몰입을 깨는 형태의 콜라보레이션 방식에서 벗어난다. 이번 작품에서는 음악이 드라마의 흐름과 동반자적 진행을 한다. 이는 송스루 뮤지컬과 같은 역할로써 음악이 개입된 형태라 볼 수 있다. 이는 음악이 이번 공연에서 극적 정서의 흐름을 만들고 작품의 의도를 자연스럽게 부각하는 도구로 활용되어 작품 내에서 음악의 상당한 존재감과 보조자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한 바람직한 경우로 평가받을 수 있다.
열 개의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게 기억시키는 방법
연극 ‘변신 이야기’가 열 개라는 적지 않은 내러티브를 다루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그리고 쉽게 이야기를 풀 수 있었던 유인은 대사의 최소화와 더불어 움직임을 강화한 측면도 들 수 있다. 장면의 정서 흐름을 음악이 만들었다면, 그 장면 마다 강력하게 전달되어야 하는 방점들은 배우들의 움직임을 최대화하여 미장센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나라를 위해 신탁을 받고자 멀리 떠나는 케윅스를 기다리는 알퀴오네 이야기를 다룬 세 번째 신화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이 장면은 성난 바다와 싸우며 항해를 하는 케윅스와 선원들의 모습이 가장 핵심인데 배우들의 군무를 통해 심하게 흔들리는 배의 형상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생존의 사투, 그러한 과정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물보라는 무대 위에 디자인된 물이라는 공간에서 실제 ‘물’로 구현된다. 이러한 미장센을 만든 것은 모두 배우들의 몸과 그들의 움직임이다. 이 부분 뿐만 아니라 각 이야기의 색채는 배우들의 움직임과 음악의 정서, 그리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조명의 조화를 통해 연출된다. 이러한 반복적인 구현방식은 관객이 작품을 더 편하게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이미지를 강조하는 크고 작은 연출의 지점
이 연극은 신화를 다루고 있어 심오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서양의 어려운 이름을 가진 생소한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어렵지 않다. 이유는 이야기가 아닌 이미지를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력들은 물을 무대 위로 옮겨와서 구현한 것과 배우의 움직임을 강조한 부분 이외의 지점들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음악이나 연기 공간을 정확히 나눈 것, 배우들을 무대 위에 관객으로 배치한 것이 바로 그 지점이다.
연기 공간의 경우, 신으로 등장하는 인물의 연기 공간을 무대 전면 발코니에 따로 구분하여 인간으로 등장하는 배우들의 연기 공간 보다 더 높은 곳에 자리하도록 배치했다. 이는 신이라는 인물에 대한 환상을 심어줌과 동시에 그가 하는 말의 집중도를 높인다. 또한 연기가 끝난 배우들을 퇴장시키지 않고 마치 관객처럼 다른 인물의 연기를 관람하도록 만든 연출은 무대 위에 배치된 배우들을 통해 메시지를 강조할 또 한 번의 기회가 생긴다는 장점이 있다. 관객 입장에서는 배우를 바라보는 관객을 볼 수 있으니 또 하나의 시선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보는 재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