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연극 ‘정글북’…빈 무대가 신의 한 수

입력 2015-06-23 18:27  



그로토푸스키는 가난한 연극의 반대말이 부유한 연극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무대, 조명, 의상 등의 요소가 연극 표현의 부유함을 평가하는 잣대가 된다는 말인가? 무대와 의상이 없어도 부유한 연극이 될 수 있다. 그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 극단 여행자의 ‘정글북’이다.

빈 무대에 대한 자신감

까만 벽, 까만 바닥, 아주 오랜 세월 그 자리에 있었을 것 같은 난간, 이층 비상구까지 이어진 길고 좁은 계단이 전부인 빈 무대는 새로움에 대한 혼란과 기대 그 자체다. 그래서 이런 빈 무대는 인간 내면에 잠자던 양가적 감정을 일게 만든다. 선택을 강요당하는 현대인들에게 혼란과 기대의 혼재는 뇌리 깊숙한 곳에 박혀있던 해묵은 일기장을 펼칠 때와 같은 기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극에서 이런 빈 무대를 활용한다는 것은 모험이기도 하지만 굉장한 자신감의 암묵적인 표현이다. 그런 모험과 자신감으로 야심차게 작품을 내놓은 이들이 있다. 바로 연극 ‘정글북’을 공연하는 극단 ‘여행자’의 주역들이다.

무대를 비우고 혈기왕성함을 채우다

연극에서의 빈 무대는 그 역사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1960년대 일었던 그로토푸스키의 ‘가난한 연극’에서 그 전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조명, 무대, 의상, 도구 등 연극에서 사용되는 모든 요소들을 배제하고 배우 자체만을 가지고 공연을 한다는 개념이 가난한 연극의 맥락인데, 모든 것이 배우의 몸을 통해 표현되기 때문에 엄격한 훈련이 선행된다. 가난한 연극이 연극의 한 사조로써 자리한 것은 무대에서 배우가 얼마만큼 표현을 할 수 있을 지에 대한 가능성을 시험해보는 장이 되고, 여러 장치 없이도 연극이 충분히 진정성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전환점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부여된다. 물론 이번 연극 ‘정글북’이 가난한 연극의 매커니즘과 동일하게 진행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정글북의 빈 무대 역시 관객에게 혼란과 기대를 안기기에 충분했기에, 그로토푸스키 시대의 예술가들이 넘어서야 했던 표현의 한계들을 충분히 시험해보는 장이 되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이 연극에서도 빈 무대를 채우는 것은 배우들 그 자체다. 특히나 건장한 남자배우의 혈기왕성함은 생명력 없는 블랙박스 안을 가득 채우고도 넘칠 에너지를 품어 낸다. 정글의 세계와 이곳에 사는 맹수들을 의인화한 이 작품에 걸맞은 선택이다.

그림자극의 활용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활용된 장치가 하나 있다. 까만 벽으로 연출된 무대를 십분 활용한 그림자 만들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림자는 인물의 정서, 감정 상태를 상징적, 극단적으로 보여줘서 정서를 강화한다. 모글리와 호랑이의 대결 장면에서 조명을 활용한 그림자 표현은 인물들의 대결 상황에 따라 그림자의 크기를 달리한 원근법을 사용한다. 인물의 감정이나 장면의 진행 상황을 명백하면서도 감성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림자는 연극의 재미있고 효과적인 장치로 활용된다.

정말 배우들이 다 한다

우리가 아는 ‘정글북’은 정글에 버려진 늑대 소년 모글리와 그를 돌보는 늑대들을 둘러싼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공연 시작 전 관객은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빈 무대에서 정글의 이미지와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빈 무대에서 시작한 극단 여행자의 ‘정글북’은 이 모든 미쟝센을 정말 배우들이 다 구현한다. 배우 간의 블로킹은 신체뿐만 아니라 말을 통해서도 빈번하고 자유롭게 이루어지는데, 코믹한 말과 빠른 대사, 대중이 잘 아는 언어유희를 보여준다. 하나의 만담 쇼를 보는 듯하다.

작품은 에피소드마다 적게는 두 명, 많게는 다섯 명의 혈기왕성한 남자 배우들의 연기로 채워진다. 연기는 움직임이 크고 동선의 범주가 넓은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연기를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사실적이고 오밀조밀한 무대장치와 대도구는 어울리지 않는다. 때문에 이 연극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떠한 무대장치나 대도구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배우의 움직임, 시선, 동작을 통해 대다수를 표현한다. 이때 관객은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며 자신만의 방식대로 상상을 하게 된다. 사실적으로 표현하지 않은 연기가 주는 매력은 바로 상상력 자극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블로킹의 백미는 배우들의 동작을 통한 미쟝센이다. 배우들의 동작이 완성된 하나의 미쟝센을 만들어 무대미술을 대신하는 부분은 어른이 된 모글리가 늑대들과 살면서 자아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부각한 마지막 에피소드에 두드러진다.

잘 아는 것을 보여줘라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몰입의 요소는 시‧청각적 효과이다. 이 작품은 유난히 음성으로 표현하는 연기가 많은데 대중이 가장 재미있어 할 만한 설정은 유명인의 성대모사를 차용했다는 점이다. 배우들의 입을 통해 신구, 최민수 등 유명인의 유행어가 터져 나올 때마다 객석은 웃음바다가 된다. 많은 사람이 같은 것을 보고 함께 웃는다는 것은 대중성이 부여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의 음성 연기는 굉장히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다.

작품에서 음성 연기 다음으로 대중성을 부여하기에 적절한 수단으로 활용된 것이 춤이다. 이 연극에 등장하는 춤은 대중이 잘 아는 장르의 춤들인데 브레이크 댄스와 탱고를 예로 들 수 있다. 브레이크 댄스는 파도의 움직임을 표현하기 위해 활용되었고, 탱고는 코브라와 몽구스의 격투를 색다르게 구현하기 위해 쓰인다. 잘 아는 춤사위가 작품의 정서와 만나면서 쉽고 재미있는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관객을 연극의 일환으로 끌어들여라

관객은 자신이 공연의 일부가 되었다고 여길 때 공연에 자연스럽게 이입한다. 이 작품에서는 이 공식을 아주 영악하게 활용한다. 첫 장면이 가장 대표적인 부분이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인 무대 양옆 계단에 마이크와 핀 조명을 설치한 연기 공간에 등장한 두 내레이터는 관객에게 이야기를 들려줌과 동시에 ‘눈을 감고 상상을 하라’는 주문을 한다. 이 순간 관객은 자신이 받은 뜻밖의 주문에 응하면서 어릴 적 엄마가 들려주는 동화에 푹 빠져드는 그 느낌 그대로 자연스럽게 연극에 이입된다. 그것도 능동적으로 이입한다. 연극이 가진 또 하나의 기능이 일상에서의 자아를 분리하여 새로운 공감으로 이끌어 자신도 몰랐던 또 다른 자아와 만나는 시간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진부하지만 잔잔한 울림이 있는 이 방식을 잘 활용했다.

그렇게 관객에게 말 걸기, 연극 안에 들어오게 하기 등으로 관객을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몰입시키는 과정에 공을 들인 작품이 연극 ‘정글북’이다. 관객에 대한 애정이 돋보이는 지점이다. 배우들이 처음에는 무대에서 객석을 바라보며 관객과 눈맞춤을 한다. 그러다가 ‘눈을 감으라는 등’의 참여를 요구하고, 그다음에는 관객을 객석으로 끌어들여 참여자로 만든다. 마지막에는 배우들이 무대에서 내려와 관객과 같은 시선으로 무대를 바라보기까지 한다. 작품을 보는 관객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극적 이입과 집중도, 재미로 이어져 관객이 능동적으로 공연을 보게 이끈다. 이러한 구성이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미 진부해진 방식이지만 이 공연에서 보여준 클래식함은 극적 몰입을 완만하게 이끌어내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효과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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