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런 선수가 왜 월드컵 때 해설을 하고 있었을까요” 호주에서 열린 아시안컵 축구대회에서 70m 폭풍질주의 주역, 차두리 선수를 두고 한 해설자가 한 말이다.
축구선수로서는 한물간 나이인 만35세의 노장선수가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연장전에서 무서운 체력과 스피드로 결정적인 어시스트를 하면서 소위 ‘축구로봇’(?)으로서 진가를 다시 확인하였다. 그런데 그의 활약이 좀 엉뚱하게 튀었다.
다름 아니라 차두리의 ‘은퇴문제’로 번진 것이다. 그는 이미 지난해 말에 이번 아시안컵을 마지막으로 대표팀을 은퇴하겠노라고 선언했는데, 그의 로봇 같은 강철체력과 놀라운 실력을 다시 확인한 축구팬들이 ‘차두리 선수 국가대표 은퇴 반대 서명운동’을 하는 등 생각지도 못한 파장이 일었기 때문이다.
사실 스포츠선수의 은퇴는 일반인들의 은퇴와 사뭇 다르다. 운동선수들은 그들의 라이프사이클에서 볼 때 배움의 기간에(Learning, First Age) 비하여 이를 사회에서 직업적으로 활용하는 기간이(Doing, Second Age) 매우 짧다. 따라서 보통사람들은 50세 이후에 찾아오는 ‘서드 에이지’(Third Age)가 빠르면 20대에, 대체로 30대에 찾아온다.
그래서 그들의 고액연봉은 대중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한 인기직업 때문이기도 하지만, 길고도 긴 은퇴 이후를 보상하는 차원에서 고액연봉을 받는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가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은퇴의 정의에 대한 논의가 다시 일어나고 있다. 어느 언론에서는 더 이상 은퇴시대가 아니라 반퇴(半退)시대가 도래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민간기업의 실질 퇴직연령이 평균 53세인 상황에서 베이비부머 세대 중 이미 퇴직을 경험한 55~59년생의 80%가 지금도 일하고 있는 것을 고려할 때 사실상 은퇴의 개념은 무너지고 계속 ‘일자리를 찾고 일을 하는’ 반퇴(半退)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더구나 기대수명이 평균 81.9세로 중대 질병이나 사고가 아니면 웬만하면 90세 이상까지 살수 있는 시대가 되어서 ‘일’은 100세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절대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은퇴(隱退)라는 말은 원래 동양의 언어가 아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신분적 분류가 직업이 되는 계급사회에서는 모든 직업은 천직(天職)이며, 은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은퇴의 사전적인 의미는 “직임에서 물러나거나 사회활동에서 손을 떼고 한가히 지냄”이라고 되어 있지만, 은퇴(Retirement)의 어원은 본래 서양에서 왔다. 프랑스어 ‘Retirer’(흐띠헤)에서 왔다.
‘Re’가 ‘뒤’ 라는 의미이고, ‘tirer’가 ‘잡아 빼다’ 는 뜻으로, 원래의 의미는 ‘후퇴하다’ ‘뒤로 물러서다’ ‘감내하다’ 라는 뜻이다. 실제 1900년대 초 미국에선 ‘사라지다. 퇴각하다’ 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용어가 1차대전 이후 전쟁에서 돌아온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하여 고령자를 생산현장에서 밀어내면서 ‘일을 그만두다’ 라는 의미로 본격 사용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 그런 은퇴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바로 연금제도이다. 1차대전 이후 미국의 은퇴시스템은 연금제도의 기반 위에 설계되었으며, 독일, 스웨덴 역시 연금제도의 정착과 함께 은퇴시스템이 구축되었다.
따라서 어원이 어떻든 은퇴라는 말의 본질적 의미는 연금제도가 잘 정비된 서구사회에서 현재의 직장에서 물러나 노동 없이 고정적인 수입(연금)이 발생하는 라이프사이클상의 변화라고 정의하는 것이 옳다. 즉, ‘노동 없이 고정적인 수입’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은퇴가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그동안 말해왔던 은퇴는 본인이 오랫동안 다니던 직장 혹은 직업을 그만두는 행위, 즉 퇴직인 것이다. 연금과 같은 ‘노동 없이 고정적인 수입’이 발생하지 않는 은퇴는 은퇴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반퇴(半退)도 없다.
한국과 같이 고령화 사회(65세이상 노인인구가 7% 이상인 사회)에서 초고령화 사회(65세이상 노인인구가 20% 이상인 사회)까지 진입하는데 걸리는 기간이 28년 밖에 안 될 것으로 예상되는 초스피드 고령화 국가에서는 서구식 은퇴생활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65세 이상 노인빈곤율이 49%에 이르는 한국에서(OECD평균은 13%밖에 되지 않음), 노인소득이 전체 평균소득의 62% 밖에 안 되는 우리나라에서 서구식 ‘은퇴’라는 개념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
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을 모두 가입한 사람이 4%도 되지 않은 나라에서, 이 세가지 연금 중 하나도 가입하지 않은 사람이 42%나 되는 나라에서(국민연금연구원, 2010) 어찌 서구식 은퇴를 운운할 수 있을까?
100세시대를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꼽아 보라면 대부분 돈(재무), 건강, 가족, 일, 여가, 관계(친구) 등을 꼽는다. 그런데 한국적 은퇴상황에서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을 하나를 고르라면 돈이 아니라 ‘일’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50대 이후 일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소득이 더 발생하고 그 동안 모아온 은퇴자금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이므로 재무측면에서 경제수명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일을 지속하면 건강관리에도 신경을 써 더욱 건강해질 수 있고, ‘삼식이’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니 가족간 관계도 좋아질 수 있다. 또한 일을 계속하므로 대인관계도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여가생활도 원활히 할 수 있다는 점에서 100세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이다.
100세시대연구소에서는 ‘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선진국의 산업구조변화’를 심층적으로 분석해보았다. 미국, 일본, 독일, 스웨덴 등 우리보다 먼저 고령화를 경험한 선진국에서 최근 30년간 어떤 산업이 성장하고 쇠퇴하였는지를 알아본 결과 예상대로 헬스케어 산업과 레저 산업과 금융업종의 성장세가 두드러졌다.
특히 직관적인 예상과 달리 부동산임대산업이 큰 폭의 성장을 하여 소위 ‘실버산업’과는 별개로 산업 구조변화가 일어남을 확인하였다. 반면 전통제조업과 의류, 가구와 같은 소비재산업은 몰락하여,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생산가능인구의 주력일 때 번성했던 산업들이 인구구조 변화에 따라 침체를 맞을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이제 은퇴의 원래의 뜻처럼 ‘후퇴하고, 뒤로 물러서고, 감내하는’ 은퇴는 없다. 후퇴해서도 안되고 물러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100세시대에는 은퇴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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