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근 칼럼] 지존파, 그때 지옥문이 열렸다

입력 2015-09-29 18:04   수정 2015-09-29 18:16



21년 전 9월, 우리는 악마를 보았다. 94년 추석 연휴 마지막날, 지존파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앳된 모습이 아직 가시지 않은 청년들이 "더 죽이고 싶었는데 못 죽여서 한이 맺힐 뿐", "돈 없는 사람들 무시하는 놈들은 다 죽이고 싶었다", "압구정동 야타족을 다 죽이지 못해 한스럽다"라는 말을 내뱉는 모습을 보며 시민들은 경악했고 공포에 떨었다.

지존파 사건은 가난하게 자란 6명의 청년들이 조직을 결성해 5명을 연쇄살인한 사건이다. 그들은 공기총, 다이너마이트 등을 마련하고 시체소각장과 감금시설까지 만들어 치밀하게 범행을 준비했고, 당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부유층 고객명단을 입수해 대상을 물색했다. `경기도 일대 러브호텔을 쓸어버리려 했다`는 진술도 충격을 안겨줬다. 이들은 심지어 강령까지 만들었는데, 여기에선 부자에 대한 적개심, 돈을 모으기 위해서라면 사람을 해쳐도 된다는 물질만능주의, 여성에 대한 증오 정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94년 1월에 그랜저 탑승자들이 자신들을 추월한 티코 운전자를 `건방지다`며 폭행해 중상을 입힌 사건이 벌어졌다. 그랜저에 탄 사람들은 권력자와 재벌가 고위직의 자손이었다. 감히 경차 따위가 고급차를 추월한 것은 불경죄라는 사고방식. 그런 일이 등장할 정도로 90년대 초엔 양극화가 크게 벌어졌다.

6공화국 때 분당, 일산 등에 신도시가 건설되면서 언론매체는 연일 땅부자들의 돈벼락 소식을 전했다.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오렌지족, 야타족 등의 행태가 화제로 떠오른 것도 90년대다. 94년엔 유학파 재벌2세의 화려한 삶과 사랑을 백화점을 통해 보여준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 안에`가 인기를 끌며 본격적인 소비사회의 개막을 알렸다.

TV와 신문을 통해 연일 그런 내용을 접하면서 개발의 혜택에서 소외된 젊은이들은 박탈감과 적개심에 빠져들었다. `저들`은 화려하게 누리면서 사는데 자신들은 영원히 빈곤할 거란 절망이 엄습했다. 지존파 김현양은 "없는 사람은 항상 없어요"라고 했다. 없는 처지에서 탈출할 사다리가 부러졌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자와 그 자식들을 죽여 화풀이를 하고, 그들의 돈을 빼앗아 자신들도 부자가 되려했다.



당시 매체들은 지존파 재발을 막을 방안으로, 불균등 발전에 따른 소외층 박탈감을 없애기 위한 복지와 소득재분배의 확대, 인간중심의 교육개혁 등을 제시했다. 이런 것들은 제대로 지켜졌을까? 지난 대선은 사상 최초로 여야가 동시에 복지강화를 주장한 선거였다. 여야가 동시에 복지강화를 외칠 정도로 우리 사회 복지빈곤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뜻이다. 그런 대선이 지난 후에도 복지가 강화됐다는 인식은 미미하다.

지나고 보니 1990년대의 양극화는 애교였다. 2000년대 한국엔 더욱 극심한 양극화가 찾아왔다. 이젠 정말로 계층상승의 사다리가 부러져버렸다. 2000년대 중반에 부동산 폭등과 투기바람이 극에 달했다. 서울 강남을 비롯한 몇몇 지역에서 아파트 가격이 최소 10억 이상으로 치솟으며 부자들이 속출했다는 기사들이 나왔다.

경쟁은 옛날보다 더 심해졌고, 비정규직이나 외주화 등 구조적으로 사람을 차별하고 멸시하도록 만드는 사회제도들이 발달했다. 바로 그래서 2000년대 이후 자살률 폭등, 출산률 하락이 나타났다. 교육은 90년대보다 더욱 황폐해졌다. 인성교육이 거의 완전히 사라졌다는 평가다. 지존파를 만들어낸 조건이 보다 강해진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보이는 증오 정서, 물질만능주의, 여성혐오도 지존파의 강령과 비슷하다. 즉, 우리는 지존파 사건 이후 악화일로를 걸어왔던 것이다. 지존파 사건은 일회적인 사태가 아닌, 양극화가 만들어내는 증오범죄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21년 전 악마를 보았을 때, 사실은 지옥문이 열렸던 것이다. 양극화를 치유하지 못하면, 교육의 가치를 회복하지 못하면, 우리는 앞으로 더욱 많은 악마를 보게 될 것이다.

하재근 문화평론가

※ 외부 필진의 의견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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