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스스하게 살짝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투명한 메이크업 때문에 비쳐 보이는 잡티도 `프렌치 시크`라니, 문외한으로서는 `투자를 안 해도 그냥 되는 게 파리지엔느인가?`라는 생각만 든다. 인터넷 용어 `패완얼(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다)`처럼, 결국 얼굴과 몸매가 받쳐 줘야만 `무심한 듯 시크한` 파리지엔느가 될 수 있는 걸까.
파리에서 살아 본 적도 없으면서 파리지엔느를 논한다는 게 얼토당토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전문가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20년 전부터 유학으로 프랑스와 인연을 맺은 프랑스 패션 전문 콘셉트스토어 `르 트와지엠`의 마리안느(본명 박수진) 대표를 만나봤다.
경력을 증명하듯, 적당히 입은 듯하지만 스타일이 살아 있는 `프렌치 시크`를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어디에 있는지 파리지엔느가 될 수 있다`는 비결과 더불어, 진짜 파리지엔느 유학생에서 방송 리포터, 프랑스 패션 전문가가 되기까지 어떤 길을 밟았는지 물었다.
▶먼저, 파리지엔느를 정의하기 전에 스스로를 소개해 주세요. 에스모드 파리 출신의 패션 학도였다고 하던데요.
-맞아요. 고교 때부터 양장점을 하시던 외할머니의 영향으로 패션에 관심이 많았어요. 흔히 하듯 재봉틀로 인형옷 만들기부터 시작했어요. 그래서 한국에서 공대 산업공학과를 다니다가 웨딩드레스 디자이너의 꿈을 품고 에스모드 파리로 유학가게 됐어요. 해 보니 제 손이 엄청 빠르고 뭘 시켜도 잘 하더라고요. 그래서 콧대가 하늘을 찔렀죠(웃음). 그런데 집안 사정으로 학교를 그만둬야 하는 상황이 됐고, 그 때부터는 학비를 벌려고 고군분투하는 생계형 패션학도가 됐어요.
▶학교를 다니면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을 것 같은데, 졸업 전부터 방송 리포터 활동을 하셨다고요.
-아르바이트를 많이 해서 다행히 학비를 벌어 학교를 다닐 수 있었어요. 그 과정에서 2000년대 초반, 당시 패션전문채널로 인기가 많던 동아TV 통신원을 거쳐 리포터 일을 시작했어요. 파리 동아TV 지사장으로 발령이 나기도 했어요. 하지만 너무 어린 나이여서 지사장은 1년 만에 그만두고 GTV, 올`리브, 온스타일, 패션앤 등의 프리랜서 통신원으로 활동했어요. 컬렉션도 다니고, 브랜드 관련 다큐멘터리도 많이 찍었지요. 2010년까지는 계속 그렇게 일하다가 2011년 프랑스의 원단 에이전시 리쿠르팅이 있어서 그쪽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그럼, 이제 정말 궁금한 걸 여쭤볼게요. 이른바 `프렌치 시크`라고 하는 파리지엔느의 스타일은 어떻게 해야 낼 수 있는 걸까요.
-제가 추천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평소에 편한 게 좋다고 해서 `막 입는 옷`만 자꾸 사지 말라는 거예요. 특별한 날 입어야 할 것 같은 옷을 사서 `막 입는` 게 좋아요. 좋은 옷이라고 옷장에 두기만 하면 결국 자기 옷이 되지 않아요. 또 사실 매일매일은 모두 특별한 날이고, 진짜 `특별한 날`도 의외로 많거든요. 누군가의 결혼식이나 파티 전날에 서둘러 쇼핑하지 말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특별한 기분을 주는 옷을 사서 평상복으로 입다 보면 특별한 스타일이 완성돼요.
▶그런데 특별한 날에 입어야 할 것 같은 옷을 수시로 사려면 너무 부담이 크지 않을까요?
-사실 그렇죠. 명품에 정신이 팔린 사람들을 좋게 보는 것은 아니지만, 명품이 괜히 그 자리에 등극한 건 아니에요. 정말 `특별하게` 차려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초라해지고 싶지 않아서 무리해서 명품을 사고 치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에요. 그런데 저도 과거에 그런 고민을 하긴 했어요. 결국은, 내가 원하는 명품 브랜드의 분위기가 나지만 가격은 훨씬 합리적인 현지 브랜드를 찾아 입으려는 노력을 하게 되더군요.
▶돈을 무조건 많이 들여서 `특별한 스타일`을 완성하는 건 아니라는 건가요?
-제가 파리에서 왔다갔다 할 때 정말 늘 옷이 문제였어요. 저는 당시에 명품이 하나도 없었고, 지금도 별로 없어요. 함부로 돈 쓰고 그러는 사람 아니에요.(웃음) 그런데 하는 일도 있고, 패션쇼장에서는 어느 정도는 저 자신을 돋보이게 해야 하는데...그 화려한 옷들에 눈만 버리고 오게 되는 거죠. 결국 마음에 드는 브랜드와 비슷한 옷을 사는 것에 눈을 뜨게 됐어요. 물론 그 노하우를 깨닫는 데 많은 노력이 필요했지요.
▶그런 옷을 골라 입는 건 흔히 말하는 `짝퉁`을 찾는다든가 `이미테이션`을 사는 것과는 다른 것이겠지요?
-조심스럽지만, 긍정적인 의미에서는 카피를 잘 하는 것도 중요한 기술이라고 생각해요. 마음에 드는 옷이 너무 고가라면,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비슷한 분위기를 내서 입는 능력을 키우라는 거죠. 제품을 똑같이 복제하는 건 표절이고 안 될 말이지만, 원하는 분위기를 비슷하게 구현하는 건 능력이라고 봐요.
▶많이 입어 봐야 그런 능력이 늘어나겠지만, 그래도 어떻게 해야 그런 노하우가 생겨날지 귀띔해주세요.
-사실 패션계에는 이제 나올 디자인이 사실 별로 없어요. 디테일이 다를 뿐이에요. 그런데, 국내에 명품 브랜드로 이름을 떨치고 있지는 않아도 프랑스에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은 로컬(local) 브랜드인 경우에는 적어도 20, 30년씩 오랫동안 탄탄하게 패턴과 봉제, 디자인을 잡아 왔어요. 이 때문에 착용감이 남다르죠. 착용감과 디자인은 사실 봉제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어요. 그런 부분을 알아보도록 노력해서 옷을 고른다면 좋겠죠. 봉제에 통달한 장인은 10년 주기로 달라지고 있는 여자들의 몸에 맞춰서 편안한 옷을 만들어내거든요. 그런 실력이 있는 브랜드의 옷이라면 믿을 수가 있어요.
▶옷 잘 입는 패셔니스타의 스타일을 따라 입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한국에서 패셔니스타 연예인들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한데, 프랑스에서도 그런지요.
-사실 프랑스에서 오래 생활한 바로는 한국의 스타 마케팅이 잘 이해되지 않아요. 상당히 특이한 일이지만, 한국 시장에서는 스타 마케팅이 중요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지요. 유럽에서 연예인 패션이 화제가 되는 경우는 파파라치 컷이 이슈로 떠오를 때 정도예요. 유럽 신문이나 패션 잡지에서는 `누가 뭘 걸쳤다`는 게 나오지 않아요. 패션 잡지는 브랜드 광고나 연예인 패션 정보를 알려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말 패션 전공자에게 영감을 주기 위해 만들어지고 있어요. 때문에 한국과는 `패셔니스타`의 영향력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그런 분위기가 개성을 만드는 것일까요?
-역사적으로 패셔니스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에요. 마리 앙트와네트가 유명해진 것은 왕족임에도 그 시대 귀족들의 유행을 선도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브랜드에는 `스타`보다는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깊이 쌓여 있어요. 미용실에서도 잡지가 아니라 신문과 책을 봐요. 내용은 요즘 유행하는 컬러나 트렌드가 어떤 것인가? 브랜드 이야기가 있어도 이 브랜드의 이번 콜래보레이션은 왜 이런 스토리로 진행됐나? 이런 내용이고요. 연예인 인터뷰는 찾아보기 힘들어요. 또 아직은 컴퓨터가 아니라 잔뜩 쌓여 있는 종이들에서 정보를 찾아야 하는 경우가 많아요. 한국과 많이 다르죠. 이런 것들이 파리지엔느 특유의 특성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했을 수도 있겠네요.
▶알뜰하고 부지런하고, 인터넷 상에서의 유행이라고 마구 따라가지 않는 파리지엔느의 이미지가 그려지네요.
-제가 직접 겪었듯이, 자신의 특성에 맞춰서 합리적으로 자신의 스타일을 정하는 분위기는 널리 퍼져 있어요. 저 같은 경우는 그들과 체형도 달라서 한국인의 체형에 맞는 브랜드를 계절별로 직접 입어보며 파악해 가는 수밖에 없었어요. 옷뿐 아니라 메이크업의 경우도 그랬어요. 늘 미용실 가면서 `특별한 날`을 만들 수는 없잖아요. 에스모드 파리의 커리큘럼 안에는 화장법을 배우는 코스도 있어요. 저는 지나치게 흰 피부를 가리기 위해 3개월 코스를 들었고, 지금도 매년 메이크업 트렌드를 스크랩하고 동영상을 보면서 공부해요. 부지런하고 알뜰하게, 계속 입어보면서 스타일을 찾아가는 것만이 방법이에요.
▶게으른 사람이 예뻐질 순 없다는 사실을 한 번 더 배워갑니다. 앞으로는 어떤 활동을 목표로 삼고 있으신가요?
-파리에서 제가 발굴한 브랜드들을 제가 경험했듯이, 쉽게 입고 마음껏 멋 내게 해 주고 싶어요. 이제는 옷을 직접 만드는 것보다 그런 징검다리의 역할을 하고 싶은 마음이 크네요. 희소가치도 있으면서 꾸민 티가 나는 그런 룩. 그게 파리지엔느를 동경하는 여인들이 원하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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