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21살 때 청년 재벌이 된 조선시대 최고의 풍운아 반복창에 관심이 쏠린다.
반복창은 조선시대 미두시장을 떠들썩하게 만든 인물이다.
미두시장의 정식명칭은 `미두취인소`로 미곡의 품질과 가격의 표준화를 꾀하기 위해 설립된 기관이다.
쌀과 콩을 현물 없이 10%의 증거금만 가지고 사고 팔던 곳으로 오늘날의 선물거래에 해당하는 `미두거래`가 성행했다.
반복창은 미두 시장에서 이름을 날린 아라키의 하인으로 처음 미두시장에 발을 들였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잘못된 투기로 아키라가 일본으로 돌아가고 미두시장이 폐쇄되며 반복창은 실업자로 전략하게 됐다.
그러나 폐쇄됐던 미두시장이 조선 총독부의 자본금 100만원으로 재개장되면서 반복창은 이곳에 500원을 투자하며 제대로 뛰어들었다.
팔면 파는대로 사는대로 이득을 얻게 된 반복창은 1년 만에 40여만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축적해 `미두계의 패왕`으로 이름을 떨치게 됐다.
그리고 1920년 당대 최고의 미인 김후동과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돈을 일본 정부에 뺏길 수 밖에 없는 미두시장의 시스템 때문에 반복창은 미두시장에서 순식간에 빈털터리가 됐다.
빈털터리가 된 반복창은 이혼과 사기사건에 휘말리는 등 거듭된 실패로 중풍에 걸려 반신불구가 됐다.
그러나 그는 미수시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투기에 집착하며 정신마저 이상해져 비참한 삶을 살다가 마흔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한편 반복창이 죽은 후 20일 만에 미두시장은 조선 땅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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