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2TV 여유만만에서 언급한 거부 최송설당에 누리꾼들의 관심이 쏠린다.
최송설당은 1855년(철종 6년) 김산군 군내면(현 김천시 문당동)에서 최창환(崔昌煥·1827~1886)과 어머니 정옥경(鄭玉瓊) 사이 세 딸 중 맏이로 태어났다.
당시 최송설당의 집안은 `역적의 집안`으로 몰려 있었다.
최창환의 조부 최봉관은 1811년 평안도에서 부호군 벼슬을 하던 중 홍경래의 난에 제대로 대항해 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돼 옥사했고, 맏아들 최상문을 비롯한 4형제는 전라도 고부로 유배됐다.
유배지 고부에서 최상문은 최창환을 낳았고 유배지의 고된 삶을 견디다 못한 최창환은 친척들이 살고 있던 김천으로 이주해 왔다.
멸문에 버금가는 벌을 받은 최창환은 변변한 전답도 없어 작은 서당을 운영하고, 그의 부인은 삯바느질을 해가며 세 딸을 키웠다.
아들이 없던 최창환은 가문의 신원(伸寃`역적으로 몰린 가문의 원한을 푸는 일)을 최송설당에게 맡기고자 한학과 한글을 가르쳤다. 그녀가 남긴 문집 `최송설당집`에 실린 한시나 가사는 `조선의 마지막 여류시인`이라고 불릴 만큼 빼어났다.
마흔두 살까지 최송설당이 김천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최송설당은 삯바느질과 농사로 땅을 불려 나갔다고 회고했지만, 장사를 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다만 1894년 상경하기 전 최씨 집안은 상당한 재산을 축적해 김천에서 내로라하는 부자가 됐다.
특히 최송설당은 일제치하 당시 민족말살정책에 대항하고자 `永爲私學 涵養民族精神(영위사학 함양민족정신· 길이 사학을 경영해 민족정신을 함양하라)`이라는 이념으로 전 재산을 희사해 1931년 김천고를 세웠다.
한편 4일 오전 방송된 `여유만만`의 `목요역사토크`에서는 `관상과 인상의 비밀`에 대해 알아봤다.
최송설당의 관상에는 강한 재물운이 느껴졌다.
최송설당이 아주 특별한 귀인을 만나서 가문의 명예까지 드높이고 큰 부를 이뤘던 이야기와 거액의 재산을 한번에 써버린 일화가 공개됐다.
[온라인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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