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유상호 한국증권 사장의 '장수 CEO 레시피'

입력 2016-03-16 17:11  

셰프는 크게 전문셰프와 오너셰프로 구분된다. 전문 셰프는 오너가 따로 있어 말 그대로 요리만 전문으로 하는 셰프를 말하고, 오너셰프는 요리도 하는 동시에 레스토랑의 주인도 겸하는 셰프를 뜻한다. 최근 요리 프로그램에 나와 대중들에게 친숙한 셰프들은 대부분 오너셰프다. 보통 자기 이름을 걸고 낸 레스토랑 전반을 지휘하며 요리부터 경영까지 도맡는다. 반면 웬만한 호텔 레스토랑은 전문 셰프를 고용한다. 호텔 전체를 책임져야 하는 CEO가 레스토랑에서 요리까지 할 수 없으니 각 분야의 최고의 셰프를 영입해 명성을 유지한다. 이런 전문 셰프의 장점은 오너의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요리에만 집중할 수 있어 더 맛있고 창의적인 음식을 내놓을 수 있다는 점이다.


▲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사장

최근 증권가에도 10년째 오너의 신임을 얻고 있는 전문 셰프 같은 CEO가 있다. 바로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사장이다. 한국투자증권은 증권가에 몇 개 남지 않은 오너 증권사다. 유 사장은 전문 CEO로, 오너인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부회장의 삼고초려에 2002년 한국투자증권의 전신인 동원증권에 합류했다. 당시 메리츠증권 소속이었던 유상호 사장은 실제로 김남구 부회장의 1년여간의 러브콜을 받았다고 한다. 유 사장은 회사를 옮기고 김남구 부회장의 부친인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을 만난 장면을 회상하며 김 회장이 "우리 식구가 될 줄 알았어요"라는 말을 들었던 장면이 아직도 기억난다고 말한다. 이직 후 불과 5년, 지난 2007년 47살의 나이로 유 사장은 최연소 증권사 CEO가 됐다. 그리고 이제는 최장수 CEO의 타이틀도 가지게 됐다. 유 사장은 이달 중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지만, 다음 주 주총에서 연임이 확실시된다.


▲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부회장(오른쪽)과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사장(왼쪽)

유 사장은 꾸준히 눈에 띄는 실적을 내놨다. 한국투자증권은 2014년까지 4년 연속 증권업계 순이익 1위 자리를 지켰다. 지난해 한 순위 뒤로 밀려나긴 했지만, 견조한 실적과 이익 중심의 경영 흐름은 흔들리지 않았다. 특히 투자금융(IB) 부문의 호실적이 더 눈에 들어오는 상황이다. 유 사장이 취임한 이후 브로커리지(위탁영업)와 IB, 파생상품, 자산관리 등 회사의 3대 영업부문이 고르게 발전한 것도 그의 경영성과로 인정받는다. 한국투자증권은 홍콩 경제지인 아시아머니지가 선정한 올해의 최고 증권사로 4년 연속 9개 전 부문 1위를 달리고 있다.

셰프(CEO)가 계속해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내니 손님(투자자)들이 찾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한국투자증권은 지난해부터 직원 평가에 고객 투자 수익률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제도를 채택했다. 그 덕분인지 고객 수익률이 더 올랐다. 수수료 경쟁 대신 고객의 자산을 중히 여긴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뭉칫돈도 들어오는 효과를 누렸다. 유 사장에 대한 직원들의 신뢰도 두텁다. 직원들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경영철학 덕분이다. 유 사장은 아무리 바빠도 1년에 약 30개 이상의 지점을 직접 방문하고 그들과 술잔을 기울인다. 유 사장은 업계에서 술이 세기로 알아주는 주객 중 한 명이다. 더구나 2,500명에 가까운 임직원들의 이름을 외워 불러 준다니 그의 기억력 아니 노력도 대단하다.

새로운 메뉴(상품) 개발을 위한 모험도 마다치 않았다. 취임 첫해 `2020년 아시아 대표 투자은행`이란 목표를 세운 이후 차근차근 해외 시장을 공략해왔다. 신성장 동력을 구축하기 위함이다. 2007년 베트남에 진출하고, 다음 해에는 싱가포르에 현지법인을 설립했고, 2010년 중국 베이징,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인도네시아 시장까지 시장을 넓혔다. 특히 유 사장은 베트남 시장의 잠재력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업계에서 가장 먼저 뛰어들었고, 2010년 인수한 현지 증권사(KIS베트남)가 이제는 업계 7위로 성장해 있다.

유 사장 본인에게 직접 장수 CEO로서의 비결을 물으니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그는 크게 비결이라기보다도 `오래 할 욕심을 부리지 않은 덕분`이라고 답했다. 유 사장은 오래 하겠다는 욕심을 부리면 단기적인 것에 조급해지고 바로 밑에 사람을 견제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사장과 임원들이 견제하기 시작하고 서로를 적으로 대하기 시작하면 결코 서로 오래갈 수도 조직이 발전할 수도 없다는 얘기다. 그는 대신 직원들을 자신의 조력자로 여긴다고 말한다. 잘하는 일은 부하의 공으로 돌리고, 못하는 일은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는 데서 신뢰가 생기고 호흡이 맞는다는 설명이다. 10년간 다져진 직원들의 신뢰와 오너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유 사장은 자신의 솜씨를 마음껏 펼쳐 보인 셈이다. 업계 최장수 CEO의 비결은 사실 앞서 언급한 여러 실적보다는 유 사장의 말대로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게 아닐까.


▲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사장이 쿠킹클래스에서 생면을 만들고 있다.

유 사장은 뜻밖에도 은퇴 후 셰프가 되는 게 꿈이라고 했다. 몇 해 전부터는 쿠킹클래스에서 직접 요리도 배우며 음식 솜씨를 다져놨다고 했다. 그가 보여준 직접 만든 음식 사진도 수준급으로 보였다. 그는 은퇴를 하고 나면 식당을 내기보다는 `살롱` 개념으로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고 지인들을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이 꿈이 과연 언제쯤 이뤄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솜씨도 뛰어나고 부지런한 셰프를 오너는 내줄 마음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유 사장이 계속해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내는 한, 그리고 그 음식을 찾는 투자자들이 이렇게 이어지는 한 유 사장은 은퇴 이후의 꿈을 조금 더 미뤄둬야 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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