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중 박태석이 앓고 있는 알츠하이머는 진부한 소재인 한편 기억을 잃어가는 인물의 변화와 결말에 대한 궁금증을 자극하는 흥미로운 소재이기도 하다. ‘기억’ 역시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박태석이 희미해지는 기억 속에서 남은 인생을 걸고 어떤 마지막 변론기를 펼칠지 관심이 모아지는 가운데 `웰메이드`로 인정 받는 역대 알츠하이머 소재 드라마가 어떤 전개를 거쳐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 되짚어봤다.
▲ 투명인간 최장수(2006)
배우 유오성의 절절한 부성애 연기로 화제를 모았던 KBS2 드라마 ‘투명인간 최장수’는 알츠하이머를 테마로 한 수작으로 꼽힌다. 극중 유오성이 맡은 최장수는 강력계 형사이자 두 아이의 아빠다. 다만 그는 가족에게 무심했던 ‘불량 아빠’였고, 가정을 등한시하다 결국 아내에게 이혼당한다. 그런 그가 어느날 갑자기 알츠하이머를 선고 받게 되고, 그는 오히려 한정된 시간 속에서 가족과 인생의 의미에 눈 뜨게 된다. 드라마는 투병 사실을 숨긴 채 가족들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주기 위해 헌신하는 최장수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다.
극중 그의 알츠하이머 증세가 서서히 악화되는 과정이 전개되면서 지금까지도 시청자들의 뇌리에 깊게 박힌 명장면들이 있다. 최장수는 ‘저는 최장수입니다. 지금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습니다. 혹시 길을 잃거나 정신을 놓고 있는 저를 발견하면 아래 번호로 연락해 주십시요’라고 쓴 메모를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드라마에서 부인 오소영(채시라)이 이 메모를 발견하고 오열하는 장면을 기억하는 시청자가 많을 것이다. 또 아이들에게 세계일주를 시켜주겠다며 놀이동산에 데려간 최장수가 급격히 악화된 증세로 어린아이처럼 길을 헤매며 선보였던 눈물 연기는 단연 백미였다.
더불어 최장수의 ‘살아있는 장례식’ 역시 지금껏 회자되는 장면. 최장수는 만성신부전증을 앓고 있는 아내에게 신장을 이식해주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의사는 알츠하이머 때문에 이식 이후 못 깨어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하지만 그는 “아내와 아이들 덕에 여지껏 충분히 행복했다”라며 조용히 마지막 순간을 준비했다. 그는 ‘살아있는 장례식’을 열고 자신의 삶에 함께 해 준 사람들을 한 자리에 초대, 일일이 인사를 전했다. 이어 “다음 세상에도 꼭 이렇게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아내 소영이 만나 결혼하구요. 우리 다미 솔미 낳아서 살고 싶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 생 만큼만 꼭 그렇게만 살았으면 좋겠네요. 이토록 많은 사랑을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결국 최장수는 아내에게 신장을 이식해준 후 끝내 눈을 감았다. `투명인간 최장수`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주인공이 가족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주기 위해 헌신한다는 내용을 그린 만큼 그저 슬프고 감동적인 드라마쯤으로 기억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스피디한 전개와 때론 밝고 유쾌하게, 때론 눈물나게 진행되는 가족에 관한 공감스토리로 웃음과 감동의 눈물을 버무려내며 수많은 마니아를 양산시킨 웰메이드 드라마로 이름을 남겼다.
▲ 천일의 약속(2011)
수애-김래원 주연의 SBS 드라마 ‘천일의 약속’은 기억을 잃어가는 여자와 그를 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그렸다. 극중 서연(수애)은 여성 소설가로 등단한 후 출판사에 다니던 어느날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는다. 그의 불행은 극 초반부터 예고됐다. 처음엔 회사에서 커피머신에 물을 끓이고 커피 넣는 걸 깜빡하거나 지독한 두통에 시달리는 등 가벼운 해프닝 쯤으로 넘길 만한 일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건망증이 심해질수록 불안은 현실이 됐다. 서연은 의사로부터 알츠하이머 선고와 함께 “한 번 지워진 기억은 다시 되돌릴 수 없게 된다”라는 청천벽력같은 말을 듣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 지형(김래원)과의 미래를 꿈꾸던 서연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이후 좌절하지만 병에 지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욕실에서 세수를 하다가도 “칫솔, 치약, 물컵, 비누, 로션”이라 읊조리고 “이서연, 서른살, 도서출판 스페이스 제1팀장, 2005년 문화신문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 작가”라고 자신의 프로필을 되새기며 사소한 것들부터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러다 불현듯 “엿 먹어라, 알츠하이머!”라고 외쳐 가혹한 운명에 당차게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다.
그 사이 서연은 임신사실을 알게 되고, 알츠하이머 환자로서 아이를 제대로 돌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해 아이를 지우려고 마음 먹는다. 하지만 아이의 태동 소리를 듣고 결국 엄마의 길을 가기로 결정, 알츠하이머 약 복용도 포기하게 된다. 출산을 앞둔 서연은 진통 중에도 “애가 나 싫어하면 어떻게 하지, 원망하면 어떻게 하지”라고 걱정하며 태어날 아이에게 "미안하다" 사과하는 모습으로 안타까움을 안겼다.
아이를 낳은 후, 서연의 증세는 심각해진다. “내 몸은 주인이 없는 빈집이 되어가고 있어”라는 대사처럼 그는 음식을 손으로 집어먹기도 하고 잠옷 바람으로 베란다에서 투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거울 속 자신이 누군지 묻거나 남편은 아저씨로, 고모는 아줌마로 불렀고 자신의 아이의 얼굴에 사과를 던지거나 가위를 들이대며 결국 한계 상황까지 내몰렸다. 이처럼 악화된 증상으로 고통스러워하던 서연은 결국 남편과 어린 딸을 남기고 죽음을 맞이했다. 그를 위해 헌신하는 가족,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 남편도 그의 병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서연의 죽음 이후, 어느새 훌쩍 자란 딸과 함께 ‘사랑해 미안해 고마워’라고 쓰인 서연의 무덤을 찾은 지형은 “난 나는 아직이다. 서연아. 아직이야”라고 울먹이며 아내를 잊지 못한 모습으로 애틋한 여운을 남겼다.(사진=tvN 드라마 `기억`, KBS2 드라마 `투명인간 최장수`, SBS 드라마 `천일의 약속` 방송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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