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N> “우리는 한국의 서울을 세계 디지털의 중심이라고 부릅니다.”
<ABC> "한국에서는 95% 가정이 광대역 인터넷을 사용합니다."
<ABC> “이곳은 세계 최고의 통신망을 갖춘 도시 서울입니다.”
IT 강국 코리아.
2000년대 중반 까지만해도 전 세계는 한국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여전히 모바일 시대의 주인공인 스마트폰 시장에서 우리 기업들은 지난 한 해 동안만 3억 6천만대 이상의 제품을 팔아치웠고
IT의 핵심인 반도체 D램 시장에서 역시 점유율 74%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세계가 4차 산업 혁명에 매진하는 오늘날 한국을 롤모델로 지칭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4차산업 후진국이란 말이 더 많이 들립니다.
실제 지표로도 드러나는데요.
지난해 UBS의 4차 산업혁명 대응도 조사에서 말레이시아, 대만보다 낮은 25위를 기록했고,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등 관련 기술은 미국과 비교해 70~80%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미국 뿐이 아닙니다. 중국에도 밀린지 오랜데요.
사물인터넷과 로봇, 빅데이터, 인공지능 등 분야에서 한국이 중국보다 뛰어난 분야는 사물인터넷뿐이라는 조사결과도 있습니다.
도대체 왜 한국은 IT강국에서 4차산업 후진국으로 전락했을까요?
그 답은 한국의 한 벤처기업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반기웅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지난 2004년 벤처기업 인포피아가 LG전자와 손잡고 출시한 일명 '당뇨폰'입니다.
테스트 막대로 혈당 등을 측정해 혈액 정보를 휴대폰에 옮겨 담을 수 있는 세계 최초의 혁신적인 제품으로 출시와 함께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전 세계시장에 돌풍을 몰고 올것이라던 기대는 6개월만에 물거품으로 끝났습니다.
고작 2천대를 팔고 생산이 중단된 것입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규제 때문입니다.
혈당 체크 기능 탓에 이 제품은 의료 기기로 분류됐습니다.
당장 휴대전화 대리점에서 파는 것부터 제지당했습니다.
판매를 위해선 의료기기 제조허가와 품목허가, 판매허가를 받아야 하는 복잡한 과정이 따라왔습니다.
휴대전화를 개발했을 뿐인데, 식약처 등 정부의 통제를 받은 겁니다.
놀라운 사실은 인포피아가 제품을 개발한지 13년이 지난 지금도 국내시장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있고,
해외 시장에선 호평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헬스케어 전문 기업, 인포피아의 주력 상품은 이제 블루투스 혈당기입니다.
혈당기로 채취한 혈액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공유해 환자들이 원격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게 핵심입니다.
기술력을 인정받아 유럽 수출길도 열렸는데, 정작 국내 매출은 전무합니다.
여전히 문제는 규제입니다.
<인터뷰> 석홍성 인포피아 연구소 부소장
"해외 수출도 하고 실질적으로는 해외에서는 사업이 이루어 지고 있는데 정작 국내에서는 여전히 원격 의료에 관련해서 법이 통과가 안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사업화가 힘들고..."
헬스케어 산업은 의료 데이터 유통과 원격 의료가 허용돼야 성장할 수 있는 구조인데,
국내에서는 지금까지 모두 법으로 막혀 있습니다.
제한적으로 원격의료를 허용하는 내용을 담은 의료법 개정안은 7년째 국회 계류 중입니다.
규제 장벽에 갇히면서 원격의료서비스는 3년째 시범사업이란 이름으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원격의료가 확대되면 질병관리에 드는 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지만, 헬스케어 산업은 5년 넘게 정체 돼 있습니다.
<인터뷰> 최윤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당뇨를 스마트 헬스 케어 기기나 사전에 관리 했을 경우 국가 의료비가 굉장히 많이 절감이 되고 2017년도에 당장 법 제도를 개선했을 경우에 2030년에 이르면 약 4조 5천억 이상의 의료비 절감이 계산이 됐습니다.”
전 세계는 4차 산업혁명 주도권을 놓고 사활을 건 전쟁 중입니다.
구글의 자율주행차 웨이모는 이미 도로 주행 실적 100만마일을 돌파했고,
IBM의 AI '닥터 왓슨'은 암 진단율이 대장암 98%, 자궁경부암 100%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난 2012년 키바 시스템즈를 7억 7500만 달러에 인수한 아마존은 창고 관리 로봇 키바를 설치해 물류비용을 20% 줄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당뇨폰은 13년째 해외를 떠돌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개발된 기술이 한국의 법에 의해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한국 4차산업 혁명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규제는 도처에 널려있습니다.
은산분리에 막힌 반쪽짜리 인터넷뱅크, 개인정보법에 걸린 빅데이터 산업, 드론이나 자율주행차를 마음껏 실험할 수 없는 까다로운 조건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조선 , 철강 등 기존 주력산업의 경쟁력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여기서도 밀리면 저성장의 늪에 빠진 한국경제는 더 이상의 미래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대통령선거에 나선 후보들은 너나할 것 없이 4차산업 공약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4차 산업을 통해 성장동력을 확보하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있지만, 후보 중 누구도 어떤 규제를 어떻게 풀 겠다는 방안은 내놓지 못 하고 있습니다.
4차 산업 후진국의 오명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4차산업 혁명의 성패는 규제와 낡은 정책을 깨느냐 깨지 못 하느냐로 결정됩니다.
한국의 규제는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지난 2000년 7500개 였던 산업관련 총 규제는 15년 동안 1만5000개로 두 배나 늘어났습니다.
세계 경제포럼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제도 경쟁력은 세계 69위, 규제 경쟁력은 세계 90위권으로 후진국 수준으로 나타났습니다.
국내 전문가들도 국내 4차산업 혁명의 가장 큰 걸림돌은 '규제'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정부는 그동안 규제는 암덩어리란 구호와 함께 규제를 단두대에 세우겠다며 규제혁파에 나섰습니다.
규제 산업 현장에서 규제는 정부의 슬로건처럼 단칼에 잘려나갔을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임동진 기자가 설명해드립니다.
지난해 8월 한 독일계 자동차 부품 회사 연구원은 개발 중인 자율 주행 차량 레이더 관련 규정을 개선해 줄 것을 정부에 요구했습니다.
레이더 안테나의 공급 전력 허용값이 다른 국가에 비해 낮아 성능을 높인 개발해도 국내에서는 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윤성원 콘티넨탈 오토모티브 연구원
“주류 기술 동향이 가는 방향이 있는데, 한국의 기술 기준을 거기에 맞춰서 조금 더 개선이 될 수 있다면 한 회사의 사업 계획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산업계에 조금 더 기회가 있지 않을까...”
다행히 지난 3월 말부터 규정은 개선됐지만 과정을 살펴보면 아쉬움이 남습니다.
규정 하나를 바꾸는 데 8개월.
자율주행차 속도전 경쟁에서 그만큼 손해를 본 셈입니다.
유럽은 정부와 학계 산업계가 상설 연구반을 운영하면서 문제 소지가 있는 규제를 미리 없애는 시스템인데, 그것과 비교하면 효율성이 떨어집니다.
규제 방식은 크게 2가지로 구분되는데요.
정책, 법률 상으로 허용하는 것을 일부 정해 주고 나머지는 모두 금지하는 포지티브 규제,
반대로 꼭 필요한 것만 금지하고 이외의 것들은 모두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허용하는 네거티브 규제입니다.
우리나라는 예전부터 포지티브 규제 체계를 사용하고 있는데
전문가들은 기술 혁신과 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미국, 중국 등에서 사용하는 네거티브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인터뷰> 구태언 테크앤로변호사
"4차 산업 혁명이라 불리는 새로운 시대에는 민간 주도의 자율규제형 규제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기존 규제 시스템은 정부 주도형 규제이거든요. 정부 주도에서 민간 주도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기존의 규제 시스템은 다분히 불합리하게 느껴지고 권력으로 느껴지는 현상이 심화 되게 됩니다“
4차산업 관련 규제는 곳곳에 박혀있습니다.
드론은 규제를 풀었다지만, 여전히 전파법과 항공법에 발목을 잡혀있고
P2P 금융은 대부업 규제를 받는 것은 물론 개인정보보호법 상 개인신용 데이터 수집이 어려워, 새로운 신용평가시스템 도입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율주행차역시 개인정보보호법과 위치정보법이 차량 데이터 취합과 활용을 제한하고 있어 육성이 쉽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이 달고 있는 규제 공화국이란 꼬리표는 4차산업혁명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IT 강국이 4차 산업혁명 후진국이 된 이유는 또 있습니다.
정부의 설익은, 보여주기식 정책에도 책임이 있다는 지적입니다.
특히 기술개발에는 성공했지만, 세계시장에서는 실패한 '한국형' IT 정책이 반복된다는 게 대표적인 적폐로 거론됩니다.
조현석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지난해 3월 천재기사 이세돌과 인공지능 알파고 간 세기의 바둑 대결.
예상과 달리 이세돌 구단이 패하면서, 우리나라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인터뷰> 이세돌
“초반에 나쁠때도 질 줄 몰랐습니다. 완벽하게 바둑을 둘줄 몰랐기 때문에, 정말 놀랬고...”
정부는 한국형 알파고를 만들겠다며, 지능정보기술연구원 설립 대책을 내놨습니다.
<인터뷰> 김용수 미래창조과학부 정보통신정책실장 / 지난해 3월
“우리기업들이 최고 수준의 기술을 단기간에 확보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 연구원은 잘 운영되고 있을까? 직접 찾아가 봤습니다.
설립한지 반년이 지났지만, 넓은 사무실의 절반은 지금도 텅 비어 있습니다.
관련 서적과 논문으로 빼곡해야 할 책장은 빈자리가 더 많습니다.
박사급 연구원 50명을 채용할 계획이었지만, 정부 예산 지원이 중단되면서 채 절반도 뽑지 못한 겁니다.
당초 이 연구원은 삼성전자, 현대차, SK텔레콤 등 7개 기업이 자본금 210억원을, 정부는 매년 운영비 150억원을 내기로 하고 설립됐습니다.
그런데, 정부가 올해 예산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연구원 운영이 사실상 멈췄습니다.
민간에 설립을 떠넘기고, 1년만에 나몰라라 한 셈입니다.
<인터뷰> 김진형 지능정보기술연구원장
"우리나라는요, 기술이 뜰 때마다 보인 반응을 돌이켜보면서 유추해보건대, 인공지능도 한 두해 지나면 또 그냥 슬그머니 없어지는 아이템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요."
예산 중단을 떠나, 이 연구원은 설립 전부터 논란이 많았습니다.
참여한 민간기업들 가운데 일부는 한해 1조원 이상을 인공지능에 이미 투자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덩치 작은 연구원 참여가 실효성이 있겠냐는 회의론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참여기업의 한 관계자는 정부의 요구가 탐탁치 않았지만, 거절하기 어려웠다고 토로합니다.
<녹취> 출자기업 전 관계자
“정부가 아이템을 정한다던지, 진흥을 위한 별도 정책을 편다던지, 이런 것들은 오히려 사업자들에게는 독이 되는 경험을 많이 했거든요.”
더 큰 문제는 정부가 주도하는 ‘한국형’ 알파고를 개발하겠다는 발상, 그 자체입니다.
민간이 하고 있던 것을 굳이 정부 중심으로 다시 판을 짜겠다고 나선 것은 정부의 안일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평가입니다.
쉽게 말해 그럴듯한 것은 정부가 하겠다는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할 일은 민간이 나서서 개발하고 상업화에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방점이 찍혀야 한다고 지적하지만 현실은 예나 지금이나 정반대입니다.
AI바둑프로그램을 만들었던 임재범씨.
그는 돌바람이라는 한국형 알파고로 2015년 세계 컴퓨터 바둑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올해엔 중국의 줴이에 밀려 8강에서 탈락했습니다.
줴이는 딥러닝을 하며 진화하는 데 돌바람은 제자리 걸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임재범 돌바람 AI바둑프로그램 개발자
“바둑프로그램 자체가 수익이 나는 사업이 아니기 때문에, 수익나는 사업 먼저 신경쓰다 보니까, 돌바람 개발에 많은 시간을 못낸 부분이 있죠 .”
정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특정 민간기업이 개발하는 것을 정부가 나서서 지원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민간회사가 만든 유망한 기술이 사장되는 것을 방치한 정부가 그 기술을 개발하겠다고 나선 것은 생색내기 정책의 전형이라는 지적입니다.
<인터뷰> 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
"4차산업혁명은 패러다임의 전환인데, 아직도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옛날의 관성으로 가고 있는거에요. 그러면서 4차 산업혁명해야 한다고 하죠. 그 목표 달성이 잘 되겠습니까?"
2000년대 초반 2조원을 투자한 모바일 인터넷서비스 와이브로, 무선인터넷플랫폼 위피 등은 민간의 반대에도 정부가 ‘한국형’ 기술개발 방식을 고집하다 실패한 경우입니다.
세계 통신 시장 흐름을 쫓지 못하고, IT강국의 체면을 구겼는데, 또 한국형을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4차 산업혁명의 동력이 민간의 자율과 창의에서 나오는 만큼 정부가 주도하는 방식이 아닌 혁신 생태계가 스스로 조성될 수 있도록 하는 게, 과거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지름길이라고 조언합니다.
<인터뷰> 윤종록 정보통신산업진흥원장
“정부가 앞에서 끄는 기관차 역할이라기 보다는 뒤에서 강력하게 미는 기관차 역할, 앞에서 운전하는 것은 민간 영역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하되, 정부가 뒤에서 밀어주는 힘, 이것은 금전적인 지원이라기 보다 제도적인 지원”
앞에서 끄는 게 아니라 뒤에서 미는 기관차 역할, 은유적 표현이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는 민간에 맡기고, 정부는빠지라는 강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도처에 널린 규제, 정부가 주도하는 방식이 또다른 규제가 되는게 현실인,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말입니다.
저성장의 늪에 빠진 한국경제가 여기서 도태되면 더 이상의 미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경제TV 조현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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