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영화 `새드 무비`에서 염정아와 남다른 모자 케미를 보여주며 연기 판에 뛰어든 여진구가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넘나드는 20대 대표 배우로 성장했다. "아역 때의 연기가 훨씬 낫다"고 말하는 그는 점점 틀에 박히는 연기 때문에 한동안 고민하기도 했다. 스무 살 어귀에 선 지금도 자신을 뛰어넘기 위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 그가 광해로 돌아왔다. 영화 `대립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을 배경으로 선조가 어린 광해(여진구)에게 조정을 나눈 `분조`를 맡기고 명나라로 피난 가자, 임금 대신 의병을 모아 전쟁에 맞서기 위해 강계로 떠나는 여정을 그렸다. 그 여정에서 남의 군역을 대신하며 먹고 사는 대립군, 백성과 함께하며 광해는 점점 성군으로 성장해간다.
`대립군` 속 광해는 스스로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하루아침에 조선의 운명을 짊어진 열여덟 살 소년의 마음은 어땠을까? 여진구는 광해의 감정, 변화, 내면의 성장을 담아내며 한 단계 성장한 연기를 보여줬다.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던 광해가 결국 성군으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여진구가 배우로서 성장해가는 모습이 엿보인다. 최근 그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영화 `대립군`에서 광해 역을 맡았습니다. 시사회에서 보니 어땠나요?
많이 떨렸어요. 이번 영화에서 배우로서 새로운 경험을 많이 했거든요. 언론 시사 때도 너무 긴장해서 기자들의 질문도 잊어버릴 정도였어요. 시사회에서는 제 부분만 봐서 다시 봐야 할 거 같아요.
광해는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로 종종 다뤄진 인물이잖아요. 배우 이병헌, 차승원처럼 대선배가 연기하기도 했고요. 그런 면에서 부담스러웠을 거 같은데 `대립군`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광해라는 인물에 공감이 갔어요. 하루아침에 조선의 운명을, 그것도 전쟁 중인 나라의 운명을 짊어지게 되었고, 세자가 된 지 고작 한 달 만에 왕의 자리도 받게 되어 몹시 마음이 무거울 인물이잖아요.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바라볼 줄 알고, 사람을 생각하는 능력이 타고난 인물이라 부럽기도 하고 질투도 났어요. 이번 영화를 선택한 이유가 결이 다른 연기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서였어요. 화산처럼 감정이 표출하고 폭발하고, 열변을 토하며 생각을 뱉어내는 연기가 아니라 잔잔히 흐르는 물처럼 감정이 흐르는데, 주변 사람들에 의해 조금씩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 그런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죠. 그래서 이번 영화가 많이 긴장되고 떨려요. 내 연기 변화를 관객분들이 잘 봐주실지 모르겠어요.
여진구가 생각하는 광해는 어떤 인물인가요?
광해는 조금 익숙한 왕이기는 했어요. 정치적인 쿠데타로 인해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임금이었는데 정치적으로 완벽한 인물은 아니더라고요. 정치를 잘하는 왕이 아니라 백성을 위하는 왕인 것 같았어요.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어찌 보면 비슷하게 백성을 위하는 광해의 모습을 그린 것 같은데, 어릴 때 전쟁을 겪어봐서인지 앞으로 전쟁을 두 번 다시 겪지 않겠다는 생각 때문에 외교 정책도 그렇고, 백성들을 위한다는 생각이 컸을 것 같아요.
여진구가 연기한 광해는 다른 작품 속 광해와 어떤 차별점이 있나요?
가장 큰 차별은 왕이나 왕세자의 입장에서 백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왕세자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인물인데 사람을 사랑하는 품성을 타고나서 주변 사람들로 인해 인정받아 왕이 되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기존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여줬던 왕세자의 모습과 아예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죠. 하루아침에 조선의 운명을 짊어지게 된 열여덟 살 소년의 마음은 어땠을까 고민했죠. 영화 초반 자신을 찾지 못하고 흔들리는 광해를 잘 표현해야 후에 성군으로 거듭나는 모습이 더 감동적일 거라 생각했죠.
그 차별점을 살리려 어떤 노력을 했으며, 어떻게 접근했나요?
대본을 보며 대사나 씬마다 적어놓고 연구했어요. 무모한 것 같지만 현장에서 선배들의 눈을 통해 전달되는 감정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즉흥적인 연기를 하려고 시도했죠. 그랬더니 지금까지 촬영한 작품들보다 훨씬 감성적이고 감정적으로 다가오더라고요. 이번 영화에서는 감정이 겉으로 엄청 뿜어내지 않는 연기를 하려고 했고, 선배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목소리 톤까지 바꿨다고 하던데요.
원래 내 목소리가 두꺼운 저음이거든요. 전작에선 주로 운명에 맞서는 역할을 맡다 보니, 강한 복식호흡으로 무게감을 살렸어요. 하지만 `대립군`에서 광해는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청춘이니까 갈피 잡지 못하고 헤매는, 맥이 빠진 목소리를 생각했죠. 리허설 때부터 디테일을 하나하나 잡아나가는 게 쉽지 않았어요.
말을 들어보니 결코 쉬운 과정은 아니었겠네요. 가장 어려웠던 점은 뭔가요?
초반 신이 어려웠어요. 광해가 갑자기 분조를 맡게 돼서 정신적으로 방황할 때, 정신이 풀려있는 상태로 겨우겨우 버틸 때를 연기 하는 거요. 정치도 모르고 왕이 뭔지 잘 몰라서 막막하지만 멋모르는 상황에서 이렇게 하면 되려나 하고 짜증도 냈다가, 쿨한 척도 했다가, 멍해 있다가 하는 모습들을 표현하기가 어려웠어요. 잘못하면 이도 저도 아니게 보여 관객들에게 혼란을 줄 것 같아서 감독님과 중요하게 많이 의논했었죠.
올 로케로 촬영해서 체력적으로도 많이 고생했을 것 같아요.
촬영 초반만 하더라도 가마에 앉아서 산에 올라가는 게 많아서 촬영하면서 산을 타지는 않았어요. 중반부터는 선배들, 스태프들과 함께 산을 탔는데 건강해지는 느낌을 많이 받았죠. 주기적으로 등산하는 느낌도 받고 공기도 좋고 풍광도 좋았어요. 그런데 선배님들은 힘들어 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하하. 여기저기 많이 다녔지만 경주에서 2~3주 정도 머물면서 촬영한 것이 가장 길게 한곳에 있었던 거고, 나머지는 어떤 장소건 2~3일 정도만 있으면서 옮겨 다니며 촬영했어요.
영화를 보며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아무래도 이 영화를 보면 정치적인 해석을 자연스럽게 하게 될 거 같은데,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어땠나요?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 정치적인 의미를 가지고 대본을 읽지는 않았어요. 작년 6~7월에 처음 대본을 받았었고, 촬영을 시작할 때는 `우리 대본은 리더에 대한 캐릭터 메시지가 좋다`라고만 생각했는데 현장에 있다 보니 뉴스에서 여러 가지 사건들이 보도되고, 세상이 변해서 선배들이 걱정을 많이 했어요. 우리 영화가 너무 정치적인 메시지로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도는 아니어서 조금 불안해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관객분들이 기분 좋게 영화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대립군`의 광해는 의병을 모으러 나선 여정 속에서 대립군, 백성들과 함께하며 서서히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잖아요. 광해가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어떻게 표현하고 싶었어요?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광해를 진정한 왕으로 만드는 건 백성들의 에너지거든요. 자신을 못 미더워하고 자조하던 광해가 여정을 거듭하며 순간순간 갖는 감정들, 스스로 옳다고 느끼는 것에 대해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 그의 성장이라 생각했죠. 촬영 전 준비도 철저히 했지만, 현장의 기운을 최대한 느끼고 리액션하는 데에 신경 썼어요.
리더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희생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것 아닐까요? `대립군`을 예로 들면, 광해가 모든 백성을 구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잖아요. 하지만 적어도 그는 조선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백성 한 명 한 명에게 너무나 빚진 마음, 미안함을 품어요. 군주로서의 앞날이 외롭고 험난하겠지만, 그 희생을 결코 잊지 않겠다고 자신을 다잡는 거죠. 그 마음을 알기에 대립군과 백성들도 리더로서 그를 더 믿게 되고, 광해도 자신을 믿어 달라고 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대립군`은 배우 여진구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때부터 내 안에도 광해처럼 불안해하고 뭔지 모를 압박감에 시달리는 모습이 있는 것 같다고 느꼈어요. 실제로도 광해를 연기하며 많은 위로가 됐고요. 극 중 광해의 모습으로 받은 응원들이 고스란히 내게도 전해졌거든요. 촬영이 끝나고도 여운이 길었던 작품이기도 하고요. 현장의 매 순간이 소중했어요.
사진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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