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희 크리에이터는 이달, 한국의 1987년을 담은 전시를 찾았다.
▲ 이태호 작가의 작품, <1987, 그날>
올봄 처음 목판을 잡고 판 것이 이 작품이다. 목판을 종이에 찍으며 작품을 마무리하고. 제목을 달아야 했다. <1987, 그날>이라 썼다. 1987년, 그날. 나는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있는 이한열 열사의 사진을 처음 보았고, 가슴이 터지는 듯했다.
이 상황에서 도대체 나는 무엇을 했던가. 그때 나는 뉴욕에 있었다. 그 엄혹한 정권 아래에서 학생들은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고 있었고, 다치고, 죽고, 희생되고 있었다. 한국에서 전송되는 사진을 보면서 나는 계속 죄의식에 시달렸다. 그때 나는 한국을 떠나 미국에 있었던 거다. 아무 때나 떠들면서 콜라를 사 마시며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중앙일보 뉴욕 지사에서 아르바이트한 덕에 국내 소식은 누구보다 빨리 접했다.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정부가 호헌을 선언한 날. 뉴욕의 한국 기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너나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날 즉석에서 기자들은 "전두환 정부는 호헌 선언을 취소하고 즉각 물러나라"란 성명을 발표했다. 유학생들은 어쩌면 한국에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젊은 기자들 대부분이 고국의 시민들에게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이후 국내 데모는 격렬해졌다. 연이어 시민들이 서로 팔짱을 끼고 누워서 대로를 점령하며 데모를 하는 사진들이 올라왔다. 시위대 맨 앞에 서서 경찰을 향해 힘껏 돌을 던지는 여학생의 사진이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나는 그 사진들을 버리지 못하고 모으고 있었다. 어떤 구체적 계획 없이. 그저 그것들이 누렇게 바랠 때까지 보관했다. 그 속에는 이한열 열사의 사진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나는 그것을 작품화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올해 마침내 목판화로 새겼다. 이 작품을 완성한 직후, 밀린 숙제를 마친 듯한. 그런 작은 해방감을 느꼈다. 그런데 마침 영화 <1987>이 상영된다고 한다. 그 영화를 만든 이들도 나와 같은 해방감을 느꼈을까. -작품 소개 내러티브 중.
<페미경TV> 이태호展, 근대 짱돌의 역사. "이건 당신의 데뷔전이야. 환갑이 넘어서 당신은 데뷔하는 거야!" 평생 미술이라는 끈을 잡고 있었지만, 작가로서 온전히 세상과 마주하지 못했다는 이태호 작가. 느지막이 작품에만 몰두해 개인전을 연 그가 지인에게 들은 말이다.
`현실과 발언` 동인 출신이다. 홍익대학교 조소과를 졸업 후, 중앙일보 미술 기자로 활동했다. 경희대학교·홍익대학교 교수로 활동했으며, 2002년 광주비엔날레를 시작으로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부산비엔날레 조각 프로젝트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 뉴욕에서도 작품 활동을 한 경험 많은 작가다. 그런 그가 느지막이 작품에만 집중해 개인전을 열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닿기 위함이다.
이태호 작가는 표현 방식을 하나의 틀에 묶어두지 않는다. 이번 전시에는 최근 작업한 작품들뿐 아니라 회화, 판화, 입체, 영상, 설치, 사진 등 40여 년 동안 작업한 것 중 알짜배기를 내놓았다. 짱돌은 평범하게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 대한 비유다. 소설적 상상력과 실제 역사를 결합했다. 한국의 1987년을 담은 목판화뿐 아니라, 전봉준과 윤동주의 사연이 얽힌 돌, 에드워드 사이드가 이스라엘 쪽을 향해 던진 돌 등 짱돌의 역사에 민중의 이야기를 담았다. 미술과 삶은 붙어 있으며, 더욱 가까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이태호 작가에게 번잡한 삶을 둘러싼 모든 사건과 물질이 작품의 구성요소이며 그 자체로 작품이다. 미술은 고상한 영역이 아닌, 먹고 사는 현실과 이어져 있다.
전시. 2월 1일(목) - 2월 13일(화) & 동덕아트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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