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데뷔 16년차. 아이 엄마가 된 이보영은 더욱 단단해져 있었다. 그래서 아이학대의 문제점을 마주하는 수진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원래는 아이에 관심이 없었어요. 내 아이가 태어나고도 100일까지는 모성애가 형성되지 않았던 거 같아요. 내가 나쁜 엄마인가 생각할 정도였죠. 그런데 이제는 내 목숨을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딸 지유가 소중해요. 또 아이를 기르다보니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소중함을 깨닫게 됐어요.”
tvN 수목드라마 ‘마더’(극본 정서경, 연출 김철규 윤현기)는 타이틀 롤을 맡은 배우 이보영의 호연이 더해져 여성 캐릭터의 신세계를 열었다는 평가다.
“스태프, 배우들, 분위기 모든 게 따뜻했어요. 이런 현장 다시 못 만날 것 같아요. ‘마더’는 대본 완고가 10부까지 나온 상황에서 촬영이 시작됐어요. 12~14부는 찍는 도중에 대본을 수정을 하면서 찍었고, 현장은 아이 때문이기도 했지만 일찍 나왔죠. 기본적으로 대본을 많이 보고 나가서 대본을 많이 볼 수 있었고, 쉬는 시간이 굉장히 확실했어요. 15~16회에만 안 쉬고 쭉 했어요. 그래도 컨디션은 최상이었고 현장 분위기도 최고였죠. 감정도 한 번에 갈 수 있게 촬영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던 것 같아요.”
‘마더’는 제목 그대로 엄마의 이야기다. 엄마 자영(고성희)과 그의 애인(손석구)으로부터 학대 받던 초등학생 혜나(허율)를 구하기 위해 엄마를 자처한 교사 수진(이보영)을 통해 모성의 의미를 돌아본다.
“이젠 뉴스에서 관련 기사만 나와도 눈물이 나와요. 내가 엄마가 되지 않았다면 아마 ‘마더’를 선택하지 못했을 거예요. 예전엔 아이가 다 사랑스럽거나 예쁘다거나 하는 생각을 하진 않았어요.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나서는 모든 아이가 다 소중하고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그 전엔 아이가 내 중심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지만 지금은 아이는 무조건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라면 지금 이 작품을 이만큼 표현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마더’ 제작진은 수진을 ‘엄마가 되기에는 차가운 선생님’이라고 소개했다. 여섯 살 수진은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던 친엄마(남기애)에게 버림받았다. 이후 유명 배우인 영신(이혜영)에게 입양됐다. 새엄마는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제공했지만, 정서적인 교감을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수진은 모성애가 결핍된 인물이었다.
“촬영하면서 정신적으로 힘들진 않았어요. 그냥 대사에 맞게 제 감정이 따라가는 대로 연기했고, 상대 배우들의 호흡을 받으면서 했거든요. 현장에서 어떤 연기를 하고 얼마나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지도 계산하지 않았어요. 제가 어떻게 연기할지 생각을 하고 현장에 가도 상대방의 연기에 따라서 많이 바뀌었죠. 또 대본의 문어체 말투가 정말 좋았어요. 문학적인 느낌의 대사들이어서 어떻게 하면 일상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렵지 않게 들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드라마 초반엔 일상적인 내용이었고, 가라앉는 내용이어서 시청자들이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봐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만약 대본이 현실적인 대사로 돼 있었으면 더 슬펐을 것 같아요.”
그런 수진이 달라졌다. 어른들에게 버림받는 게 두려워 학대 사실을 밝히지 못하는 혜나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봤다. 이에 혜나를 데리고 도망치며 엄마가 되어갔다. 이 때문에 유괴범으로 몰린 수진은 경찰과 추격전을 벌인 끝에 붙잡혔다. 14회에서 법정에 선 수진은 “내가 혜나였다”며 “시간을 되돌려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다시 혜나의 손을 잡고 도망칠 것”이라고 말했다.
“남편(지성)이 대본을 읽어 보더니 ‘너와 혜나의 멜로네’라고 하더라고요. 혜나와 대사할 때 어린이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에게 하듯이 했어요. 수진은 혜나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어요. 어릴 때 힘들었던 것, 학대받은 게 창피했던 것, 입양된 사실을 숨기고 싶었던 위축된 마음을 혜나에게 친구처럼 가르쳐줬죠. 혜나에게 친구처럼 가르쳐 주는 게 어릴 적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고, 어린 적 자신에게 뭔가를 알려준다는 느낌이었어요.”
법정 장면에선 특히 이보영의 열연이 돋보였다. “엄마가 되고 싶었던 적이 없다”며 자신의 과거와 혜나에 대한 진심을 고백해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퉁퉁 부은 눈과 여윈 얼굴, 담담하면서도 떨리는 목소리가 수진의 고통을 고스란히 전달했다. 엔딩에서는 자신을 한 번 더 유괴해 달라는 혜나의 전화를 받고 “미안하다”며 오열하는 모습으로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율이가 초반에는 현장을 너무 좋아하면서도 아이이다 보니까 그저 신나는 마음인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주인공은 그러면 안 돼. 연기에 집중해야 돼. 감정 잡아야 돼’라고 말해주기도 했어요. 그런데 캐비닛 안에 들어가 있는 장면을 찍을 때부터 헤나는 윤복이가 돼 있더라고요. 그 이후 ‘이렇게 하라’는 등의 터치를 전혀 하지 않았어요. 율이는 어떤 파트너 보다 최고였어요. 현장에서 짜증 한 번 안 냈고 대사 NG도 없었을 뿐더러 현장을 매우 즐거워했어요.”
‘마더’는 혜나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수진을 통해서 모성보다 넓은 범위의 공감이 가족 관계를 지탱함을 시사했다. 수진 외에도 자식을 소유물로 생각하는 자영, 남편 없이 홀로 세 딸을 키운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영신 등 여러 유형의 엄마를 보여주며 ‘당연한 모성은 없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마더’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았어요. 나도 아이와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해요. 아빠들이 아이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충분히 인정해주는데 ‘엄마는 무조건 이래야 돼’라는 말에 대해 의문과 반발심이 있었어요. 부부가 같이 육아하는데 아빠는 칭찬을 받는데 엄마는 왜 반대의 말을 들어야 할까 싶더라고요. 그래서 엄마에 대한 얘기를 더욱 하고 싶었고, 아동학대 기사들도 점차 눈에 띄기 시작하면서 이 드라마를 해야겠다 싶었어요. 하지만 방송일자가 다가오면서 무서워졌고 ‘내가 미쳤었구나’ 싶었어요.”
이보영은 2013년 배우 지성과 6년여의 열애 끝에 결혼식을 올리며 많은 화제를 낳았다. 결혼 1년만인 이듬해 임신 소식을 전했고, 2015년 첫 딸 지유를 출산했다. 이보영은 딸 지유에 대한 애정도 아낌없이 드러냈다.
“드라마 후반부에는 촬영을 하느라 2주정도 딸을 제대로 못 봤어요. 그 사이에 많이 컸더라고요. 우리 부부가 알려진 사람들이다 보니까 ‘딸이 우리 때문에 안 힘들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은 많아요. 더 조심해서 더 잘살아야지 싶어요. 이 아이가 우리로 인해서 힘들어질 수도 있으니까 책임감이 더 커지는 건 확실히 있어요. 부모의 직업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면 좋겠어요.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려고 노력해야죠. 나이들 수록 느끼는 게 엄마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느껴요. 지금도 아이를 봐주시고 나 때문에 고생 중이세요. 막상 앞에서 표현은 잘 못하지만 정말 든든하고 영원한 내편임에 감사드려요.”
배우들의 호연이 빛난 ‘마더’는 가 제1회 칸 국제 시리즈 페스티벌 공식 경쟁부문에 진출한다. 전세계 드라마 중 9개 국가 10개 작품만 선정된 공식 경쟁부문에 아시아 대표로 ‘마더’가 선정됐다. 칸 국제 시리즈 페스티벌은 MIPTV 2018의 메인 행사로 올해 처음 개최되어 큰 의의를 가진다. 4월 4일부터 11일까지 프랑스 칸에서 열리며 전세계 130여개 작품 중 단 10개 작품만이 공식 경쟁부문에 올랐다. 또한 공식 경쟁부문에 선정된 10개 작품은 4월 7일부터 11일까지 뤼미에르 대극장에서 스크리닝된다.
“되게 좋았어요. ‘마더’를 하면서 작품을 찍는 건 정말 공동작업이라는 생각을 자주했어요. 스태프 모두가 ‘마더’를 사랑하면서 찍었고 그 과정이 너무 좋았어요. ‘마더’가 가끔 다시 꺼내보고 싶은 작품이 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이번 드라마에 참여하면서 특히나 저를 행복하게 했던 점은 우리 가족, 주변 사람들이 저를 ‘이보영’으로 보지 않고 ‘수진’으로 봤다는 점이에요. 대중들에게도 계속 꺼내보고 싶은 작품이었으면 좋겠어요.”
16년 차 이보영은 도도하고 차가울 거란 이미지와 달리 유쾌하고 또 솔직했다. 내숭 없이 솔직한 여배우는 모습은 언제 봐도 사랑스럽다.
“신인 때 내가 나왔을 때 재밌을 거야 하는 신뢰를 주는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그런 반응들을 볼 때는 내가 목표하고 꿈꿔왔던 것에 다가가고 있는 것 같은데 ‘더 실망시키지 않아야 할 텐데’라는 생각이 들어요. 솔직히 작품에 들어갈 때는 다 잘 될 줄 알고 들어가죠. 결국 잘 된 작품을 생각해보면 삼박자가 맞아서 잘 된 거지 누구 하나가 잘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그런 작품을 만나는 게 솔직히 쉽지 않아요. 그럼에도 이렇게 운 좋게 좋은 작품을 잘 만나서 감사해요.”
한국경제TV 디지털이슈팀 유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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