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로와 혹사가 만연한 대한항공 승무원들의 잔혹사는 회사와 감독기관 그리고 노조까지 외면한 사각지대에서 발생했다.
뒤늦게 소관부처인 국토부가 나섰지만 승무원들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다. 승객들의 안전도 문제지만 승무원들의 근로 여건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만큼 이제 고용노동부가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무엇보다 경영진의 독단적인 태도와 입을 닫은 노조가 바뀌지 않는 이상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게 대한항공 안팎에서 들리는 얘기다.
◇ 국토부 "이르면 3월말 대책 발표"…"엄중히 살필 것"
국토부는 지난 달부터 이달 초까지 국내 항공사들에 대한 특별 테마점검에 나섰다. 대한항공 뿐 아니라 대부분의 국내 항공사에서 승무원 부족과 과로, 연차휴가 보장 문제 등 혹사 논란이 이어지자 서둘러 조사에 나선 것이다.
또 최근 한 대한항공 승무원이 회사를 고발하는 국민청원에 나서며 사회적 이슈가 되자, 국토부는 대책 마련을 서두르고 있다. 국토부 관계자는 "현재 점검 결과를 분석하고 있다."며 "이를 토대로 이르면 3월말 늦어도 4월초에는 대책을 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계속되는 언론 보도를 통해 문제가 많다는 점을 알고 있다"며 "평소보다 엄중하게 사안을 보고 있다"고 강조했다.
국토부는 당초 운항승무원(기장)의 피로관리 기준을 개선하기 위해 발주 예정이었던 연구용역에 객실승무원도 포함하기로 했다. 또 항공안전법 규정 자체가 지나치게 회사 측에 유리하도록 돼 있다는 지적에 따라, 필요하다면 관련 규정 개정 추진에 나설 예정이다.
◇ 여전한 `칼피아…항공안전감독관 70% `KAL` 출신
하지만 정작 승무원들은 국토부와 대한항공 간의 유착을 의심하면서, 국토부가 내놓을 대책에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있다. 한국경제TV 취재결과, 항공사들을 감독하는 국토부 항공안전감독관 21명 가운데 14명이 대한항공 출신이었다. 전체 감독관의 70%에 가까운 숫자다.
대한항공 출신들을 부정적으로 이르는 `칼피아`라는 말은 지난 2014년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회항 사건 당시 처음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당시 16명의 항공안전감독관 가운데 14명이 `칼피아`였고, 이들은 조사 과정에서 대한항공 측에 문서를 유출해 비난 여론에 휩싸였다. 이에 국토부는 항공안전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오는 2019년까지 대한항공 출신을 50% 이하로 낮추겠다는 대책을 내놓기도 했다.
실제로 3월 초 대한항공에 대한 현장점검을 실시한 항공안전감독관 5명 중 2명도 대한항공 출신으로 확인됐다. 이에 대해 국토부 관계자는 "규정상 직전 경력이 대한항공 출신인 경우는 배치하지 않고 있다."며 "현장에 나간 2명 역시 대한항공 근무경력이 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또 다른 관계자는 "현재 고참 항공안전감독관은 다 대한항공 출신일 수 밖에 없는 구조"라며 "아무래도 현장에 나가면 이들이 조사과정을 주도하는 것도 현실"이라고 털어놨다.
◇ `사각지대` 놓인 승무원…이제 고용부 나서야
상황이 이렇다보니 대한항공 안팎에서는 승무원들의 근로 여건에 대한 문제가 국토부에서 다룰 사안이 아니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서 기본적으로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승무원들의 권리를 먼저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승무원 업무에 대한 대부분의 규정들은 국토부 관할인데다, 특수성이 있는 직업이라 그동안 방치된 것도 사실이다. 국토부가 현장 조사를 하더라도 안전규정만을 따질 뿐 근로 여건에 대한 문제는 뒷전이었다. 또 고용부는 특수한 항공사 업무를 고려해 회사 측의 입장을 상당 부분 고려하면서, 그동안 사각지대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국토부 관계자는 "그동안 고용부에 이첩하거나 조사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면서 "이번 점검은 결과에 따라 고용부와 합동조사에 나설 수도 있다"고 밝혔다.
현재 대한항공은 승무원들의 연차휴가를 거의 주지 않고 있다. 대한항공 측은 "인력 부족으로 주지 못하고 있다"고 답하고 있지만, 한 두해에 걸쳐 벌어진 일만은 아니다.객실 승무원의 경우. 매달 21일 다음달 스케줄이 나오는데 휴가를 받기 위해서는 스케줄이 나오는 전달말까지 신청해야 한다. 4월에 갈 휴가를 2월말까지 신청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신청을 해도 연차휴가가 나오는 일은 극히 드물다는게 승무원들의 증언이다.
지난해 말 대한항공이 연차를 주지 않는다는 한 언론보도 이후, 대한항공은 부랴부랴 상·하반기 5일씩 연차를 주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하지만 실제로는 객실승무본부 그룹 내 팀별로 단 이틀씩만 휴가를 주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것도 팀원 모두가 회사가 지정한 달, 같은 날에 휴가를 가는 것이다. 승무원들이 국민청원에까지 나선 이유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연차가 높은 승무원들의 경우 쌓여 있는 연차가 100일을 넘는 경우가 다반사다. 대한항공은 퇴직시 남은 연차를 몇달간 소진하도록 하고 있는데, 그렇게 되면 기본급이 적고 비행수당이 많은 승무원들은 퇴직금이 줄어드는 불이익이 발생한다. 근로기준법은 연차를 사용하지 않으면 매년 그에 대한 보상을 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대한항공은 취업규칙으로 미사용 연차를 이월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매번 같은 이유로 연차를 주지 않는 것은 법 위반이다. 대한항공의 근로감독을 담당하고 있는 서울남부고용노동지청 역시 이같은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 지청 관계자는 "현재 노사가 이 문제를 협상 테이블에 놓고 진행중인 것으로 안다"며 "상황에 따라 적극적으로 지도하겠다"고 답했다.
◇ 입 닫은 노조…남부고용지청 "한번도 진정 안해"
승무원 잔혹사의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이 소속된 노조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2월 현재 대한항공 일반직 노동조합의 조합원 1만997명, 이 가운데 객실지부 조합원은 5천347명으로 절반에 달한다. 연차휴가를 매년 보상하지 않고 무작정 이월하는 취업규칙을 노조가 동의했다는 점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그동안 노조는 승무원들이 부당하게 연차를 사용하지 못하는 부분이나 부당한 취업규칙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인천공항에서 만난 한 승무원은 "우리 노조는 어용이다. 휴가를 쓰지도 못하고 보상도 못받는데 노조는 뭉개고 있다"며 "노조비가 아까워 탈퇴하고 싶어도 불이익이 두려워 탈퇴 못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승무원은 "노조위원장을 대의원들이 뽑는 간접 선거라 우리 의견이 반영이 안된다"며 "대의원도 단수후보로 끼리끼리 정해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서울남부고용노동지청에 문의한 결과, 대한항공 노조는 회사가 연차사용을 못하게 하고 보상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단 한번도 진정을 넣거나 조사를 요구하지 않았다. 쓰지도 못하고 보상도 못받는 연차휴가가 100일 넘는 사람이 수두룩 하지만 아무런 문제 제기를 안한 것이다.
대한항공을 담당하는 지청 관계자는 "지난 연말부터 언론보도가 나오면서 들여다봤는데, 이상하게도 그동안 노조가 문제를 제기한 적은 한번도 없다"며 "만약 노조나 직원들이 취업규칙에 대한 진정을 했다면, 당연히 현장 조사에 나섰을 것이다."고 말했다.
통상 노조나 근로자가 진정을 제기하면 근로감독관이 지정되고, 근로감독관은 조사에 나선 뒤 날을 잡아 회사 대표를 불러 조사를 한다. 이후 근로감독관리 시정조치를 내리고 회사가 이를 이행하기 않으면 검찰로 송치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회사에서는 대표가 불려가 조사를 받기 전에 문제가 해결되는 일이 다반사다. 현재 대한항공의 대표이사는 오너인 조양호 회장과 아들인 조원태 사장이 맡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 대한 노동조합의 입장을 듣기 위해 두차례나 취재 요청을 했지만, 노조 측은 아무런 입장을 밝히지 않았고 취재에도 응하지 않았다.
◇ "쥐어짜기 경영의 실패"…대책마저도 무리수
모든 문제의 시작이 오너 조양호 회장과 아들인 조원태 사장의 지나친 긴축경영 탓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조원태 사장이 대표이사로 등장하면서 쥐어짜기식의 비용절감이 더욱 심해졌다는 사실은 대한항공 안팎에 잘 알려져 있다. 원만한 경영권 승계를 위한 첫 해 실적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문제는 턱없이 부족한 인력에서 비롯된다.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수년간의 걸친 지속적인 인력 부족은 결국 경영의 산물이라는 게 노동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현재 대한항공이 추산하고 있는 승무원 부족분은 1천명에 이른다. 대한한공 측은 올해 500명을 충원하겠다는 계획이지만, 늘어나는 퇴사자와 장기 병가자를 감안하면 제자리일 뿐이라는 게 승무원들의 설명이다.
승무원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내놓은 대책도 회사 내부에서 반발을 사고 있다. 현재 대한항공은 승무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비행편 마다 승무원 숫자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다양한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업무를 줄여 안전 규정만 준수하는 수준으로 승무원 숫자를 줄이고 그만큼 휴가를 주겠다는 계획인데, 지금도 최소한의 인력으로 기내서비스를 하고 있는 현장에서는 `조삼모사`식의 미봉책이라며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이에 대해 대한항공 객실승무본부 측은 "지속적인 업무절차 개선과 통합으로 객실승무원 업무가 상당 부분 줄었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라며 "이를 전제로 업무 효율성 제고를 위해 인력 운영 조정을 검토 중"이라고 설명했다.
◇ 결과는 늘 승무원 몫…"공포의 댓글요정 DDY"
얼마전 국민청원에 나섰던 승무원은 조양호 회장을 `절대권력 댓글요정`이라고 칭했다. 조양호 회장은 고객들의 불만이 올라오는 회사 홈페이지를 자주 찾기로 유명하다. 승무원들에게 악명 높은 조양호 회장의 코드명은 `DDY`다. 제보에 나선 한 승무원은 "DDY가 댓글을 달면 끝이다. DDY가 직접 나서니 임원들은 더 난리를 치고 그 비행기를 탔던 승무원들이 경력이 끝나는 거다"라고 토로했다.
조양호 회장은 얼마전에는 한 직원 과실로 발생한 손해를 `직원 월급으로 송금하라`라는 댓글을 달아 논란이 되기도 했다. 직원의 실수를 회장이 직접 언급하며 질책하는 `댓글 경영`은 외부에서는 단순한 웃음거리지만, 현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라는 게 제보에 나선 승무원들의 일관된 증언이다.
과로와 부족한 휴식, 법으로 정한 휴가를 가지 못한 승무원들은 오늘도 비행기를 타고 있다. 피로 누적으로 떨어지는 서비스의 질과 함께 고객들의 안전이 우려되는 부분이다. 갈수록 늘어나는 고객들의 불만과 여기에 더해지는 `DDY` 댓글은 승무원들에게 공포가 되고 있다. 이같은 악순환의 굴레는 숫자로 증명된다.
지난해 한국소비자원에 접수된 대한항공에 대한 소비자 피해구제 접수 건수는 140건으로, 1년 전(98건)보다 43%나 늘었다. 같은 기간 아니사아항공에 대한 피해구제 접수 건수는 110건에서 108건으로 오히려 줄었다. 2017년은 항공사들에 대한 전체 소비자 피해구제 접수 건수가 4년 만에 처음으로 줄어든 해다.
◇ `승무원들의 절규`…국민청원 어느새 6천명 넘어
`대한항공의 불법적인 노동력 착취와 인권침해`(http://www1.president.go.kr/petitions/163328)를 고발한 청와대 국민청원은 열흘 만에 6천명을 넘었다. 다른 국민청원과는 달리 직접적인 이해관계자가 대한항공 승무원 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숫자다. 현재 대한항공 승무원은 약 7천명이다. 한 승무원은 "6천명이면 현장에서 일하는 거의 모든 승무원들이 참여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포공항에 만난 승무원은 "누군지는 몰라도, 청와대에 해결해 달라거나 청원이 20만명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올린 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회사의 횡포를 노조도 정부도 방치하는 이 상황을 세상에 알리려는 절박함에서 나섰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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