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시대 종식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90년 이후 오랜 만에 ‘스트롱 맨(strong man)’ 체제가 재구축되고 있다. 특히 한반도 주변국이 뚜렷하다. 세계 어느 국가보다 대외환경에 의존하고 ‘남북 분단’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는 우리 경제 여건에서는 ‘팻 테일 리스크’가 될 가능성이 높아 주목된다.
스트롱 맨 체제는 작년부터 구축되기 시작했다. 미국 국익을 최우선시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작년 1월에 취임했다. 같은 해 5월에는 ‘강한 프랑스’를 주창했던 에마뉘엘 마크롱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북핵 위협에 따른 일본 국민 보호’라는 명목으로 아베 신조 총리도 장기집권 의욕이 드러났다.
이달 들어서는 스트롱 맨 체제가 더 가시화됐다. 양회 대회를 통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시황제’로 부상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2024년까지 장기집권이 가능해져 이오시프 스탈린에 이어 ‘차르’ 반열에 올라섰다. 사민당과 대연정이긴 하지만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16년 동안 집권이 가능해졌다.
작년 이후 스트롱맨 체제가 재구축되는 요인을 경제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 사태에서 비롯된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선진국과 신흥국(사회주의 국가 포함) 간 성장격차가 빠르게 축소됐다. 이 때문에 세계 경제 추진력으로 간주돼 오던 ‘세계화’를 보는 시각이 경제대국 통수권자를 중심으로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화가 진전되기 시작한 1960년대 이후 선진국과 신흥국 간에는 소득격차가 현저하게 확대됐다. 1960년 선진국 소득의 8% 수준이었던 저소득 신흥국의 1인당 소득은 1980년대 말까지 1% 내외로 떨어졌다. 선진국 입장에서 미국 캘리포니아대(얼바인)의 케네스 포메란츠 교수는 ‘위대한 발산(great divergence)`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사정은 달라진다. 신흥국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선진국과의 소득격차가 축소됐다. 기술격차이론(M.V. Posner)에서는 후발국은 선발국의 지식과 기술을 흡수함으로써 압축성장이 가능하다고 봤다. 신흥국 입장에서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FT)의 마틴 울프 칼럼리스트는 ‘위대한 수렴(great convergence)’이라 불렀다.
특히 고용 문제에 있어서는 위대한 수렴을 뛰어넘어 신흥국이 선진국을 앞서는 ‘역(逆)위대한 발산(reverse great divergence)’ 현상까지 나타났다. 세계화 진전과 정보기술(IT)이 발달된 선진국일수록 경기회복에 따른 고용창출효과가 크게 떨어졌다. 2000년 이후 각국의 세계화 정도와 실업률 간 산포도를 그려보면 뚜렷한 ‘정(正)의 관계’ 나타난다.
글로벌 기업과 증강현실 산업은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 경험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들 분야에서 취약한 청년층과 중하위 계층의 실업이 급증하는 추세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 본거지인 런던에서 폭등 사태가 발생한데 이어, 자본주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뉴욕에서 ‘반월가(Occupy Wall Street) 시위’가 일어난 것이 각국에 커다란 파장을 몰고 오고 있다.
금융위기 이후 각국의 경기부양 정책에서 종전처럼 단순히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일자리 창출에 최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점도 이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버락 오바마 정부 시절부터 추진했던 세계화와 반대되는 리쇼오링(resouring) 정책은 트럼프 정부의 보호주의와 맥을 같이 한다.
스트롱 맨은 자국의 이익과 자신의 이익을 강조한다. 트럼프 정부의 보호주의 정책에서 출발했지만 중국에 이어 전통적인 미국 우호국인 유럽과 일본도 맞대응할 태세다. 달러 약세 정책에 대해서는 자국통화 평가절하보다 미국에게 더 불리한 탈(脫) 달러화로 대응하고 있어 종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양상이다.
보호주의는 스트롱 맨이 추구하는 국익 달성과는 특별한 관계가 없다. 보호주의 지수(1-미국 해리티지 재단의 자유무역지수)와 국익 상징지표(무역수지)를 회귀분석한 결과를 보면 무의미한 것으로 나타났다. 스트롱 맨일수록 ‘갈등과 대립’보다 ‘협력과 공존’이 더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북중 정상회담, 남북 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 한미 간 금리역전, 제2 외환위기설, 한국판 플라자 합의 논쟁…. 최근 우리 경제를 둘러싼 메가톤급 현안들이다. 각각의 현안도 호재와 악재 요인이 겹쳐 있는 만큼 명암을 파악하기 어려워 더 혼란스럽고 주가 등 각종 가격변수의 변동성도 크게 확대되고 있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한국판 플라자 합의’ 논쟁이다. 플라자 합의란 1980년대 초 국제수지 불균형의 주범인 미국과 일본 간 무역적자를 줄이기 위해 인위적으로 엔화 강세를 유도하기 위한 합의를 말한다. 10년 동안 지속됐던 플라자 체제에서 엔·달러 환율은 240엔대에서 79엔대로 폭락했다.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일본 경제는 소니와 도요타로 대변되는 막강한 제조업 경쟁력으로 미국을 제치고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할 것으로 기대됐었다. 하지만 플라자 합의 이후 급속히 진행된 엔화 강세의 부담으로 ‘디플레이션 탈피’를 공식 선언한 지난달까지 장기간 침체를 겪었다.
제2 플라자 합의 대상으로 거론되는 국가는 중국과 한국이다. 미국과 중국 간 무역마찰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가운데 위안화 가치가 연일 절상되고 있다. 시진핑 정부의 의지가 반영되는 중국 환율제도 특성상 위안화 가치를 올려 고시하는 것은 미국과의 무역마찰을 의식한 것이 아니냐는 시각에서 플라자 합의 가능성이 나오는 배경이다.
위안화 절상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학수고대해 오던 관심사이자 과제였다. 대선기간부터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한다고 약속을 해온 상태에서 지금까지 이 공약을 지키지 못해 부담을 느껴왔다. 미국 무역적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중국과의 무역적자를 줄이기 위해서도 위안화 절상은 필요하다.
중국도 부담이 되긴 하지만 위안화 절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시진핑 정부 출범 이후 위안화 국제화 과제, 국제통화기금(IMF) 특별인출권(SDR) 편입,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설립 등을 통해 국제위상을 높이려고 노력해 왔다. 중국 중심의 팍스 시니카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안전통화로서 위안화 기능이 높아져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비 때마다 환율로 어려움을 겪어온 한국은 중국과 사정이 다르다. ‘키코(KIKO)’ 사태가 대표적이다. 금융위기 이후 원·달러 환율이 급락할 것으로 예상한 수출업체를 중심으로 환 헤지를 했다. 하지만 ‘마진 콜(증거금 부족)’을 당한 미국 금융사의 디레버리지(투자자산 회수) 과정에서 원·달러 환율이 급등해 환차손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10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는 키코 사태의 정반대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역(逆)키코 사태’다. 2015년 12월 이후 미국 중앙은행(Fed)의 금리인상으로 원·달러 환율이 급등(달러 강세)할 것으로 우려한 수입업체(글로벌 투자 금융사)를 중심으로 이번에는 반대로 환 헤지를 걸어놓았다. 하지만 원·달러 환율이 하락하자 이미 상당 규모의 환차손을 입고 있다.
달러 투자자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말 기준으로 개인의 달러 예금은 130억 달러가 넘는다. 원·달러 환율이 하락할 때마다 달러 예금이 아직도 늘어나고 있다. Fed의 추가 금리인상에 따른 달러 강세 기대가 남아 있거나, 언제든지 높아질 수 있는 한반도 지정학적 위험을 겨냥해 이기적으로 달러를 사들인 결과로 이해된다.
곤혹스러운 것은 우리 외환당국이다. 역키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원·달러 환율을 끌어올릴 경우 트럼프 정부로부터 환율 조작국에 지정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대로 한국판 플라자 합의를 수용해 원·달러 환율이 급락할 경우 키코 사태 이상으로 환차손이 불어날 가능성이 높다. 현 정부가 처한 어려운 여건이다.
트럼프 정부의 통상압력은 더 거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출범 이후 1년 동안 미국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극단주의 보호주의’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무역적자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 왔으나 오히려 확대됐다. 오는 11월 중간선거 이전까지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할 경우 트럼프 대통령과 집권당인 공화당이 궁지에 몰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국민과 함께 풀어야 한다. 환율은 통화 간 교환비율로 근린궁핍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일방적으로 오르고 내릴 수 없어 수익률이 적고 수수료도 비싸다. 우리 경제를 둘러싼 메가톤급 현안이 겹친 틈을 타 달러 사재기에 나서는 것은 우리 경제를 어렵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곤경에 빠트리는 이기주의 행동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때다.
<글. 한상춘/한국경제TV 해설위원 겸 한국경제신문사 논설위원(<a href="mailto:schan@hankyung.com">sch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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