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가족과 함께 미국령 괌으로 건너가 중고교를 다닌 뒤 로스앤젤레스(LA)에 있는 서던캘리포니아대학(USC)에 입학하면서 미국으로 이주했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처음에는 회계·재무 관련 일을 했다. 은행이 첫 직장이었고 이후 스포츠 의류업체에서 일했다.
이어 숙녀복 브랜드를 띄워 사업가로 변신했다. 매장에 직접 쇼룸을 만들고 어깨 너머로 디자인도 배웠다고 한다.
네 아이를 둔 주부로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그를 정계에 입문시킨 사람은 남편(찰스)이었다.
오렌지카운티 비영리기구에서 일한 남편은 한미위원회를 만들고 친한파 에드 로이스 의원과 오래도록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로이스 부부와 영 김 부부는 자주 식사도 하면서 친하게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로이스 의원이 남편을 통해 영 김에게 보좌관 자리를 제의했다. 남편이 적극 천거했고 사업가 출신의 주부였던 영 김은 정치에 발을 들이게 된다.
주 상원의원이던 로이스가 연방 하원의원이 되면서 이후 영 김은 21년이나 그를 보좌했다. 워싱턴DC에서는 한미의원연맹 일을 도우면서 한국 정계에도 인맥을 넓혔다.
라디오서울 등에서 방송일도 하면서 캘리포니아 한인사회에도 얼굴을 알렸다.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정치에 도전한 건 2014년. 캘리포니아 주 의회 하원 선거에서 민주당 현역 샤론 쿼크 실바를 꺾는 이변을 연출하며 주 의회에 진출한다.
코리언 아메리칸 여성으로 공화당 출신의 주 의원은 캘리포니아에서 처음이었다.
그러나 2년 뒤 리턴매치에서는 실바에게 석패했다.
영 김은 이후 오렌지카운티 슈퍼바이저(집행관) 선거를 준비했다. 2017년만해도 모든 게 카운티 슈퍼바이저에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로이스가 전격 은퇴를 선언하면서 사실상 바통을 이어받아 연방 하원으로 진로를 바꿨다. 지난 6월 정글 프라이머리로 불리는 예비선거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해 본선에 올랐다.
영 김의 정책은 기본적으로는 공화당 주류와 궤를 같이한다.
감세 정책과 오바마케어 폐지, 성소수자(LGBT) 관련 법안에 대한 입장이 그렇다.
하지만 이민 문제는 좀 복잡하다.
스스로 자랑스러운 이민자임을 자처하는 그는 불법체류 이민 청년들을 구제하는 다카(DACA)에는 찬성한다. 트럼프식 무관용 정책에는 반대한다. 하지만 또 캘리포니아의 피난처 도시법에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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