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게 만난 일본인 2명과 현지 교민이 전하는 '아베'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대북제재 위반 의혹을 핑계로 일본이 이달 4일부터 반도체 소재에 대한 수출 절차를 강화했습니다. 우리 정부는 이를 '경제보복'으로 규정하고 WTO 제소 등 대응에 나서고 있죠. 반일감정이 고조되면서 일본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도 일어나는 상황입니다. 뉴스에서는 한일 관계가 곧 붕괴될 것처럼 표현하기도 하는데요. 일본사람들은 이 사안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취재를 시작하고 주변을 수소문해 어렵게 일본인 2명을 섭외했습니다. 둘 다 한국에 직업을 갖고 있고, 몇 년간 살아 우리 사회에 적응한 분들이었죠. 하지만 인터뷰 직전 모두 거절했습니다. 최근 한일 관계에 대해 물어볼 수 있다고 하니 "정치 문제에 대해 발언하고 싶지 않다"며 연락을 끊었습니다.
'역시 민감한 주제라 어렵나'라며 취재를 포기할 무렵 운 좋게 나카무라 유미(가명, 26) 씨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익명 인터뷰였지만 '거절의 충격' 탓에 물어보기 조심스럽더군요. 다행히 20살부터 6년째 한국에서 지낸 그는 일본 아베 총리에 대해서 거침없이 말했습니다.
● 일본인 유미 씨 "日 보복, 정말 '아베'다운 행동"
유미 씨는 이번 일본 경제보복에 대해 "참 아베답다"고 평가했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일본에서의 아베의 이미지라고 하는데요. 이번에도 역시나 아베가 본인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내린 결정이라고 인식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실례지만 한국 정치를 보면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정치인은 아베처럼 자신의 입지를 위해 모든 것을 거는 것 같지 않다는 겁니다. 이 말을 듣고 "국내에서도 정치가 사익 추구에만 매달린다고 비판하는 여론이 많다"고 말해줬더니 유미 씨의 답변이 걸작이었습니다. 유미 씨는 "아베가 보면 코웃음 칠 것"이라고 하더군요. 한국 정치인들이 아베 만큼 집요하게 목적을 추구하진 않다는 뜻 같았어요.
유미 씨의 말대로 본인의 입지를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 아베는 한국에 수출규제를 단행한 걸까요. 공교롭게도 일본 참의원 선거가 이달 21일에 열린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우연이 아닐 겁니다. 다만 그 효과는 불분명해 보입니다. 15일 발표된 여론조사에서 아베의 지지율은 49%를 기록해 지난달보다 7%p 낮아졌습니다.
일본 현지에서도 유미 씨와 비슷한 반응일까요? 이번에는 현지에 있는 교민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 현지교민 경아 씨 "반한감정?…오직 K-POP 얘기 뿐"
일본 도쿄에서 1년 넘게 IT 회사를 다니고 있는 고경아(38) 씨와 전화통화를 했습니다. 고 씨는 일본 아베 신조 총리에 대한 여론은 엇갈리는 분위기라고 말합니다. 잘했다는 시선도, 너무 독단적이라는 의견도 있다는 겁니다.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가 강화되면 일본 기업도 메모리 반도체 점유율 60%가 넘는 한국 시장을 잃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실제 일본 대표적인 경제지인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일본의 이번 수출규제로 반도체 국제 공급망에 혼란이 우려된다며 일본의 존재감도 저하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다만 제가 "일본 수출규제가 시작된 뒤 현지에 변화가 있나?"라며 심각하게 묻자 고 씨는 웃으면서 "밖에 돌아다니거나 미용실을 가도 K-POP 얘기밖에 없다. 딱히 반한 시위가 늘었다는 소식은 못 들었다"고 전했습니다.
한일 경제마찰이 실제 삶에 미치는 영향은 적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한국에서의 일본 제품 불매운동에 대한 반감도 못 느낀다고 합니다. 고 씨는 "원래 일본에서 선호하는 한국 제품이 음식이나 화장품 정도인데, 이것들을 불매하자는 움직임은 없다"고 답했습니다. 삼성이나 LG가 원래부터 일본에서는 점유율이 낮았던 만큼, 딱히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피해가 갈 만한 물건도 별로 없다는 다소 힘빠지는 반응이었죠.
"K-POP 때문에 한국 문화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서 한국 사람이라고 하면 우호적으로 대해준다"는 고 씨의 말을 통해 오히려 K-POP이 일본에서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만 실감했습니다. 때마침 방탄소년단(BTS)이 일본 오리콘차트에서 1위를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 일본인 아유노 씨 "사람들 관심없어요. 정치는 정치일뿐"
혹여 또 인터뷰가 무산될까 여기저기 전화번호를 뿌려놓은 게 효과가 있었습니다. 한국의 한 대학에서 한국어 강사 이수 프로그램을 듣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타니가이토 아유노(23) 씨가 흔쾌히 인터뷰에 나섰습니다. 아유노 씨는 일본의 최근 트렌드가 '한국'이라고 말했습니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반도체 수출규제 강화로 이슈가 된 게 아니라 K-POP 덕에 한국음식을 먹고 한국어를 배우는 게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이라고 말이죠.
아유노 씨는 "다만 본인은 K-POP을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대신 대학에 한국인 친구가 있어 자연스럽게 한국을 접하고, 좋아하게 됐다."고 솔직하게 말했어요. 한복을 3벌 갖고 있다고 하니 관심이 얼마나 많은지 짐작할 수 있더군요. 자연스럽게 어려운 질문도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죠. "일본사람들은 한국의 일본 제품 불매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사람들 별로 관심 없다"는 아유노 씨의 대답에 조금 허탈했습니다. 한국 사회를 들썩여놓고 정작 일본인들은 별로 관심이 없다니.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배상문제를 배경으로 경제보복을 단행한 자국 사안에 무관심하다는 게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일본 2030세대는 정치·경제에 아예 관심이 없냐고 물었습니다. "관심이 있어도 말하지 않는다"고 아유노 씨는 짧게 답했습니다.
대화를 통해 속마음을 얘기하지 않는 일본의 정서를 조금 알 것 같기도 했습니다.
실제 아유노 씨의 부모님도 딸을 한국에 보내놓고 걱정이 많았다고 합니다. 최근 이슈 때문에 일본 사람이라고 차별받지 않을까란 우려입니다. 하지만 그는 "뉴스에서 보던 불매운동도 보지 못했다. 사람들이 오히려 잘 대해줘서 불필요한 걱정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정치는 정치일뿐 사람 관계까진 미치지 않는 것 같다"고 덧붙였습니다.
● '정치는 정치일 뿐'이라지만…장기화 되면 한일 국민들은
한일 경제마찰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이견이 많습니다. 일본 참의원 선거가 열리는 21일 전후로 진정될 거라는 시각도 있지만 내년 도쿄올림픽 전까지 이어질 거라는 분석도 나옵니다. 당장 수출규제 품목이 반도체 소재 3개로 한정됐다는 점에서 한일 양국 국민간에 온도차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대로 경제 마찰이 지속된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일본이 당장 다음달 한국을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고 수출규제 품목이 무차별 늘어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태가 지속되고 우리 국민의 감정이 골이 더 깊어진다면 더 이상 "정치는 정치일뿐"이라는 말을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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