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입 당시 약관대로" 분쟁은 여전
금융위 징계 '발등에 불' 삼성생명
기준·내용 공개 없이 21명 합의 논란
삼성생명 서초 사옥 앞에는 최근까지 암 보험금을 지급하라는 천막과 현수막이 걸려 있었습니다. 현수막들이 사라진 건 7월 9일. 삼성생명이 집회를 이어온 `보험사에 대응하는 암 환우 모임(보암모)` 회원 21명과 시위를 중단한다는 내용의 합의를 하면서입니다. 보암모 회원들은 본사 앞 트레일러의 시위도구와 플래카드를 제거했고, 점거해왔던 삼성생명 2층 고객센터에서도 철수했습니다. 암 보험금을 지급하라며 암 환자 단체들이 집회를 시작한 지 꼬박 662일, 사옥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인 지 542일 만이었습니다.
다만 문제가 하나 남아있었습니다. 보암모 회원 중 21명을 어떻게 선택한 건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합의한 건지가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백방으로 취재를 해봐도 `선택 기준`과 `합의 내용`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양측의 합의가 이상하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지난달 28일 또 다른 집회 단체인 `암 환자를 사랑하는 모임(암사모)` 회원들은 서울 광화문 금융위원회 앞에 모여 다시 삼성생명의 암 보험비 지급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삼성생명과 일부 암 환자들의 합의는 밀실야합"이라는 주장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어디서부터 문제가 꼬인 걸까요.
● `직접`, 두 글자가 문제였다
이용범 암사모 대표를 만났습니다. 삼성생명과 암보험 가입자들과의 분쟁은 약관 해석 차이에서 시작했습니다. 문제가 된 약관 문장은 `암의 치료를 직접적인 목적으로 수술·입원·요양한 경우 암 보험금을 지급한다`입니다. 1994년 3월 이 대표가 받은 보험 증권에는 `암 치료를 목적으로 계속 입원 시 암 입원금을 지급한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즉 17년 동안 약관이 조금씩 변경되면서 `직접적인`이라는 단어가 빠진 겁니다.
분쟁은 직접적인 암 치료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으로 번졌습니다. 암 환자들은 암 수술 후 요양병원 입원과 후유증을 치료하는 것이 치료에 포함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삼성생명은 암의 직접 치료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험금을 지급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17년 동안 약관이 조금씩 변경되어온 점도 쟁점 사안입니다. 암사모 측은 삼성생명이 자의적으로 약관을 바꾼 것은 보험사가 보험금을 주지 않기 위한 `꼼수`라고 주장합니다. 세월이 지나 `직접적인`이라는 표현이 추가됐다고 암 수술 후유증 등 비용을 못 받는 건 억울하다는 겁니다.
억울한 건 삼성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17년 동안 약관이 조금씩 바뀐 건 금융당국의 지시였기 때문이죠. 삼성생명 관계자는 "금융당국이 소비자의 오해를 줄이기 위해 `직접적인`이라는 표현을 추가할 것을 지시했다"고 말했습니다. 나아가 설사 약관이 바뀌었더라도 보험금 지급 기준은 그대로였다고 주장합니다. 과거에 `직접적인`이라는 표현이 없었을 뿐, 결국 보험금을 지급하는 기준은 직접적인 암 치료뿐이었다는 겁니다.
● 법원 "약관이 전부는 아니다" 승소했는데…
삼성생명뿐 아니라 다른 보험사들에서도 비슷한 분쟁이 일어나자 금융당국이 정리에 나섰습니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2018년 9월 `암보험 약관 개선 TF`를 구성해 이에 관한 개선 방안을 마련했습니다. 이후 암의 직접적인 치료란 `암을 제거하거나 암의 증식을 억제하는 치료, 후유증·합병증의 치료와 면역력 강화 치료 등은 직접적인 치료에서 제외된다`라고 명시했습니다.
대법원에서도 요양병원 입원치료는 암 치료와 `직접` 연관성이 없으므로 입원비 지급 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삼성생명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사례마다 다를 수는 있지만 암 수술 후 요양병원에 입원하는 것이 암의 직접 치료와는 연관성이 없을 수 있다는 걸 법원이 공인한 겁니다.
전문가들도 삼성생명의 손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한 보험법 전문가는 "암의 치료`보다는 `암의 직접 치료`가 더 명확하다"면서도 "다만 요양병원 입원이 `암의 치료`에 포함되는지는 개별 사안마다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일례로 말기 암 환자가 요양병원에서 면역 증강제를 투여받고도 보험금을 받은 사례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경우 암 환자의 요양병원 입원 후 면역 증강제 투여는 암 치료를 직접 목적으로 한 것으로 보지 않지만, 말기암 환자는 치료를 받더라도 호전될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법원은 보험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겁니다. 즉, 보험금 분쟁이 발생할 경우 약관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으며 개별 요소에 따라 구체적인 사실 관계를 파악해야 한다는 결론입니다.
● `발등에 불` 삼성생명, 21명을 고른 기준은 없었다
이렇게나 유리한 상황인데, 갑작스레 삼성생명이 보암모 회원 21명과 합의한 이유는 뭘까요? 삼성생명이 급한 합의를 진행해야 했던 배경에는 금융위원회의 중징계가 있습니다. 지난해 말 금융감독원은 삼성생명에 중징계에 해당하는 `기관경고`를 통보했습니다. 500여 건의 암 입원보험금에 대해 부당 지급 거절을 했다는 이유에섭니다. 500여 건에 이번에 합의한 21명은 들어있지 않습니다. 금융위에서 징계를 확정하면 삼성생명은 앞으로 1년간 신사업 진출이 제한되니,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입니다.
통상 보험사 징계건은 한 달 내로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징계를 확정할 금융위원회는 아직까지 5차례 회의를 하며 고민 중입니다. 금융위가 장고를 거듭하고 있는 상황인 거죠. 이에 `삼성생명의 징계 수위가 낮아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옵니다. 특히 삼성생명 입장에서는 암 환자들과 서둘러 합의한다면, 중징계를 받지 않을 명분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삼성생명과 합의한 21명은 어떻게 정해진 걸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선정 기준은 없었습니다. 암 환자들의 구체적인 개별 사례를 따진 것도 아니었고, 농성장에 나온 횟수도 아니었고, 마지막까지 농성장에 남아있던 인원들도 아니었습니다. 취재를 종합해보면 이번 합의는 암 환자 단체 측에서 먼저 합의 인원을 제안했을 정황이 큽니다. 삼성생명 관계자는 "합의한 인원 가운데 점거 농성을 이어가던 환자들이 포함됐다"면서도 "삼성생명이 합의할 인원을 선택한 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삼성생명은 합의를 마쳤으니 더 이상 논란이 일지 않길 바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덮고 넘어가기엔 석연치 않은 내용이 많죠. 이 대표는 "마치 007작전처럼 합의가 이뤄져 전날까지 아무도 몰랐다"라며 "이번 합의는 밀실 야합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합니다. 원칙 없는 합의는 마침표 대신 물음표만 남깁니다. 합의 내용과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다면 이 분쟁의 마침표가 찍히긴 어려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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