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VINA 칼럼] 간이역(라오스)에서 만난 사람들

입력 2021-12-27 11:07  

기차는 밤이 깊어도 오지 않는다
대합실 난로는 홀로 자정을 핥는데
샛강을 건너간 기차는 다시 오지 않는다
흘러간 강물도 한번 가면 영영 기별이 없다
수수깡처럼 말라가는 라오스의 12월
매콤한 풀 연기는 따끔따끔 콧속을 쑤시며
대지의 목마름 대신 쾌쾌한 눈물샘을 해빈다
사람들이 떠나고 사람들이 다시 오고
역장도 간판도 없는 12월의 간이역에서
이별은 준비되지 않은 채 기차는 떠났다

우연히 왔다가 홀연히 사라진 12월
매일 아침마다 무더운 코스를 돌며 담배꽁초를 줍고
막혔던 잡목들을 수없이 쳐내어 산바람을 불러들이고
구멍 난 홀도 메꾸어 사뿐히 꿈을 집어넣고
볼 때마다 라오스 모두의 감탄을 자아내었다
그늘 아래 구름도 잠시 멈추어 낮달을 바라보고
평화가 너울너울 춤추어 한나절 드러눕고 싶던
마음이 허하지 않아야 청춘이라며
육십 나이가 대수냐며
젊은 어른이 되어 술 사발을 던지듯 권하며
아직 사랑할 일이 많아서 행복하다며
가족 품이 최고라며 돌아올 차표도 끊지 않고
12월 간이역을 훌쩍 떠나고 말았다

라오스에도 삼총사가 있다며
삼국지의 삼총사의 전설을 다시 쓰겠다고
타들어가는 야자수 그늘 아래에서
비어라오 맥주잔을 부딪치며 도원결의를 맺었단다
백색 공으로 라오스 그린을 평정하겠다는
형제의 결의는 주말마다 햇살만큼이나 뜨거웠다
행여 게임이 풀리지 않아 도시락이 되는 날에는
얼음도 없이 맥주 거품으로 속살을 거덜 냈다
누군가는 쓰러져야 끝나는 결의는 더 단단해졌으나
결과는 꼭 마음 같지 않은 것이 공의 원리
어느 날 제비가 사는 동네로 사내 관우가 떠났다
인사발령을 핑계로 라오스를 뜨자
슬픔 때문인지 우기 때문인지 몇 달간 비가 내렸다
식당 테이블에는 빈 병 몇 개가 늘었다
그 슬픔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사내 유비도 그린을 평정하겠다는 욕망을 뒤에 남겨둔 채
갓을 쓰고 동해 바닷가로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겨울이 물든 라오스의 그린은 아직 푸름인데
큼지막한 장비만 우두커니 남아
야자수 그늘 아래에서 멀쩡한 클럽만 내동댕이
12월에는 왜 이리 구름처럼 사라지는 인연이 많은가?

아직 최빈국에서 벗어나지 못한 라오스(2024년 졸업예정)에는
식량지원 등 국제기구들도 많이 들어와 있다
코이카며, 경제협력 기금 등 한국의 지원기구도 맹활약하고 있다
비엔티안 영문 조간에 큼지막한 기사를 자주 보게 된다
빼어난 활약으로 다른 나라의 부러움을 살 정도란다
중학교 때부터 국제기구에 일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외국어는 물론 교양이며 품성까지 정열을 쏟아붓은 여성이
이곳 라오스 국제기구에서 크게 활약을 하고 있다
외국어 구사능력이 원어민과 혼동될 정도라고 한다
고위직에서 당당히 일하면서도 주말에는
라오스 대표 소녀 가장으로 버텨내고 있다
책임감이 얼마나 강한지 부쳐진 이름이다
일이 끝나기 전에는 절대 잠들지 않는
향후 세계적 리더가 될 것이 분명한 그녀가
언젠가는 떠나야 할 라오스를 대신할
다음 행선지를 정하기 위해
떨어진 간의 의자를 대신할
무엇인가를 더 채우기 위해서
12월을 비워두고 잠시 라오스를 떠났다

며칠 전 시집 한 권이 날아왔다
이곳 생활을 마치고 떠난 공관원이
청춘을 고스란히 담은 낭만 소야곡이었다
라오스 사람보다 더 라오스 같은
진즉 라오스 사람은 더 도회지 사람 같은데
여기 사는 동포들이나 주재원들은
인간의 이기의 때가 벗겨지기 때문인지
태초 자연인으로 퇴화되고 있기 때문인지
욕심을 비워가며 배려해 주고 채워주고 있다
지난주 있었던 주재원과 현지 아가씨 결혼식에
모든 이들이 열 일을 제치고 흥을 북돋아 주었다
얼마 되지 않지만 신랑의 기가 꺾일까 봐
가호 한번 잡겠다고 숯불 바비큐까지 들고나서자
햇살도 기세에 눌렸는지 뺨을 감추고 서쪽으로 종종걸음이다

라오스에서 머무는 동안
헌신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감탄할 때가 많다
사고가 나거나 어려운 일이 있으면 공관원들이 먼저 와 있다
어쩔 줄 몰라 쩔쩔매는 상황에서 늘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메콩강변과 마주 앉은 태극기나 기념탑이
훼손되거나 페인트가 벗겨지기라도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음날이면 더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다
한국을 알리려는 행사뿐 만 아니라 국격을 높이려는
부지런한 이들의 발걸음은 24시간제다
대한민국 국민이란 자긍심이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다
간이역처럼 잠시 머물러 가는 라오스인데도
지극한 정성들이 한 뜸 한 뜸 꿰매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 때문에 슬프기도 하지만
사람 때문에 살기도 한다

강변 야시장의 붉은 천막은
밤마다 세워지고 아침이면 사라진다
뜬구름 같은 인연의 간이역, 라오스의 12월
하늘도 세평, 땅도 세평(승부역 표지판)
간이역처럼 세평도 안되는 12월의 인연
세월이 가고 세월이 오듯
사람이 가고 사람이 또 온다
지붕 넘어 낮달이 넘어가듯
기차는 밤새 어디론가 달려간다


칼럼 : 황의천 라오스증권거래소 C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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