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진단] '고래 싸움에' 러 진출 韓기업 '발 동동'

임원식 기자

입력 2022-03-08 19:15   수정 2022-03-08 19:15

    <앵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야기한 이른바 `신 냉전` 상황에서 우리 정부와 기업들이 그야말로 초비상입니다.

    미국과 러시아 간 패권 다툼에,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분위기인데요.

    산업부 임원식 기자와 자세한 얘기 나눠 보겠습니다.

    임 기자, 미국의 대러시아·벨라루스 경제제재 조치죠, 해외직접제품규칙, FDPR 면제국 명단에 이름을 올리면서 한숨 돌리나 싶더니 곧바로 러시아가 우리나라를 비우호 국가로 지정했습니다.

    <기자>

    하루 새 천당과 지옥을 오간 것 같다고 할까요?

    먼저 이른바 `뒷북 논란`이 일기도 한 FDPR 면제국 확정 얘기부터 드리자면요.

    미국 밖의 외국 기업이 만들었다고 해도 미국의 원천 기술을 썼다면 수출할 때 미국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규제인데 이 FDPR 적용 대상국에서 우리나라가 빠지게 됐습니다.

    산업통상자원부와 미국 상무부가 오늘(8일) 이 같은 내용의 공동 성명을 발표했는데요.

    앞서 미국이 지난달 발표한 FDPR 면제 32개국 명단에 우리나라가 빠지면서 반도체를 비롯해 자동차와 컴퓨터, 통신 분야 수출에 적잖은 타격이 있을 거란 전망이 나왔다는 걸 감안하면 참으로 다행이라고 하겠습니다.

    문제는 미국이 주도하는 러시아 경제제재 행렬에 동참하면서 러시아가 사실상 보복 조치를 발표했다는 건데요.

    우리나라를 비롯해 48개 나라를 비우호 국가로 지정하면서 외교적 제한을 포함한 제재에 나섰습니다.

    제재 수위는 좀 더 두고 봐야 겠지만 당장 러시아와의 교역 규모가 작지 않은 데다 현지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 또한 적지 않아 피해가 클 것으로 예상됩니다.

    <앵커>

    러시아에 공장을 두고 있는 기업들이 적잖은 것으로 아는데 사업 차질에, 피해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겠군요.

    <기자>

    현대차그룹을 예로 들어보면요.

    지난 한 해 러시아에서 판 자동차가 기아 20만 5,801대, 현대차 17만 1,811대 해서 37만 대가 넘습니다. 판매량 기준 2위, 3위 수준이고요.

    여기에 러시아 제2의 도시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현대차 공장이 있는데 연간 생산량이 20만 대나 됩니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이달 들어 공장 가동을 멈춘 상태인데 아직 재가동 시점조차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와 LG전자 역시 고민이 큰데요.

    삼성의 경우 TV와 스마트폰에서, LG의 경우 냉장고와 세탁기 등 생활가전 분야에서 러시아 시장 1등 브랜드들입니다.

    두 기업 모두 모스크바 인근에 공장을 갖고 있는데 이번 사태로 러시아 사업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눈치만 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처럼 우리 기업들이 러시아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높은 데다 IMF 시절에도 러시아에서 철수하지 않았다 할 정도로 우리 기업들이 그 동안 러시아에 들인 공이 적지 않은 만큼 당장 사업 철수를 결정하기 어려운 처지입니다.

    당분간 상황을 지켜보면서 전쟁이 속히 마무리 되길 기다릴 수 밖에 없다는 입장입니다.

    <앵커>

    기약 없는 기다림, 참 답답한 상황인데 국내 조선업계는 상황이 더 심각한 것 같더라고요.

    <기자>


    러시아에 내려진 제재, 러시아가 내린 제재, 대상이 다른 이 두 제재에서 국내 조선업계가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러시아에 내려진 금융 제재죠.

    국제은행간통신협회 `스위프트(SWIFT)`에서 러시아가 퇴출되면서 수주대금을 받는 데 차질이 생겼다는 점,

    또 하나는 이번 비우호국 지정으로 러시아 정부와 기업이 달러나 유로화가 아닌 러시아 자국 통화인 루블화 결제가 가능해졌다는 점입니다.

    1달러 70~80루블 선에서 거래 됐던 루블화 가치가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지금은 150루블 정도 되거든요.

    거의 반토막 난 건데 더 큰 우려는 앞으로 더 떨어질 것으로 전망되는 루블화 가치를 러시아 정부가 60% 가량 높게 책정해서 고시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럼 국내 조선 3사가 러시아로부터 수주한 선박이 얼마나 되느냐, 무려 8조 원 정도로 추산됩니다.

    특히 삼성중공업의 경우 러시아 LNG 개발 사업에 참여하면서 5조 원 넘는 설비 공급 계약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배 한 척 만드는 데 통상 2~3년 걸리기 때문에 당장 피해는 없을 거라고 하지만 러시아로부터 수주 대금을 제 때, 제 값에 받을 수 있을 지, 행여 계약이 취소되는 건 아닌 지 걱정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닌 상황입니다.

    <앵커>

    대기업들 상황이 이 정도인데 러시아 수출 중소기업들 사정은 더 심각할 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기자>

    지난해 기준 국내 중소기업들의 러시아 수출액이 27억 5천만 달러입니다.

    중소기업 전체 수출의 2.8% 정도로, 규모로는 세계 10위 정도인데요.

    이들 기업들이 지난 2일부터 4일까지 사흘 동안 정부에 신고한 피해건수가 44건입니다.

    70%가 대금 결제가 늦어지거나 안해 준다는 내용이고 러시아행 항공, 해운 중단으로 물류가 막혔다, 계약이나 납품이 보류됐다는 얘기들이 올라왔습니다.

    또 이들 기업들 대상으로 무역협회에서 애로사항을 접수 받았는데 421건이 올라왔습니다.

    열에 아홉은 대금 결제와 물류, 공급망 문제로 어려움을 표했고 정보 부족으로 애를 먹고 있다는 기업들도 다수였습니다.

    <앵커>

    산업 분야, 기업 규모를 가리지 않고 곳곳에서 막대한 피해가 우려되는데요.

    이런 가운데 정부가 조금 전 수출업계와 긴급 회의를 열고 대책 마련에 들어갔습니다.

    현장에서는 어떤 목소리들이 오가고 있는 지 신재근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기자>

    정부가 러시아 수출 기업들을 지원하기 위해 대책 마련에 나섰습니다.

    러시아가 한국을 비우호국가로 지정하면서 우리 수출기업들이 환차손은 물론 유동성 위기에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여한구 /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 현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적시적인 대응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보고…기업 애로 등의 문제를 가지고 관계부처에서 긴밀하게 협의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할 계획입니다.]

    수출 현장을 누비는 기업들은 러시아 제재에 따른 어려움을 호소합니다.

    최근 러시아에서 `조 단위` 수주를 따낸 한 조선업체는 말 그대로 비상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가치가 떨어지고 있는 루블화로 수출대금을 받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입니다.

    [조선업계 관계자(음성변조): 시간이 흘러서 금융제재가 구체화되고, 상황이 언제까지 갈 것인지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상황 보고 면밀히 검토하고 있습니다.]

    루블화는 한 달 만에 가치가 달러화보다 40% 넘게 떨어졌습니다.

    러시아로 향하는 하늘길과 바닷길이 막히면서 물류 업체들도 사정은 마찬가집니다.

    [자동차업계 관계자(음성변조): 이번 사태와 관련해서 현지에서는 생산과 물류 운송 측면에서 조금씩 영향을 받고 있고요. 사태 장기화 여부나 추가적인 서방 제재 상황을 보면서 추가 대책을 마련할 계획입니다.]

    자금 사정이 상대적으로 나은 대기업과 달리, 중소기업 사정은 더욱 어렵습니다.

    대금 결제가 하루만 늦어져도 당장 유동성 위기를 겪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소기업 관계자(음성변조): 러시아 은행이 거래가 안 되니깐 어떤 방식으로 받을 수 있는지, 또 환차손이 발생하는 부분이 우려됩니다.]

    물론 러시아 수출기업이 무역보험공사에서 관리하는 단기 수출보험을 통해 유동성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하지만 해당 보험에 가입한 기업은 4,800여 곳 가운데 181곳에 불과합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가리지 않고 피해를 호소하는 기업들이 계속 늘고 있지만, 정부는 아직 뾰족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앵커>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우리로선 하루 바삐 전쟁이 멈추기 만을 기다릴 뿐 당장은 이렇다 할 대책을 찾기가 어려워 보이는군요.

    그래도 피해를 줄이기 위한 정부 차원의 조치들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기자>

    러시아 수출 의존도가 높은 기업들이 버틸 수 있도록 긴급 융자나 대출만기 연장과 같은 금융 지원이 우선이겠고요.

    당장 러시아 수출길이 막힌 만큼 이를 대체할 새로운 수출길을 발굴하는 것 역시 시급해 보입니다.

    기업 스스로도 대처할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러시아 제재와 관련해 기업들과 정보를 공유하는 시스템 또한 구축돼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무역협회 장상식 동향분석실장의 말을 들어봤습니다.

    [장상식 / 한국무역협회 동향분석실장 : 일단 단기적으로는 선적 후에 결제를 받지 못한 기업에 대한 대체결제 같은 게 필요해 보이고요. 정부로서는 핵심 원자재에 대한 수급 점검도 필요해 보입니다. 무역업체가 대금 결제 불안을 느끼지 않도록 장기적으로 양국 간의 청산 계정 같은 것을 마련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합니다.]

    <앵커>

    네, 여기까지 듣도록 하겠습니다. 산업부 임원식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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