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인이 인플레이션(이하 인플레)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30∼40년 만에 최고 수준은 이제는 예사로 보일 정도다. 선진국 국민들은 인플레로 겪는 경제 고통이 하늘을 찌를 태세다. 신흥국 국민들은 11년 전 실업 문제로 거세게 불었던 ‘아랍의 봄’이 이번에는 인플레 문제로 다시 불 조짐이 일고 있다.
인플레를 ‘짖지 않은 개(The Dog That Didn’t Bark)’로 경시해 왔던 국제통화기금(IMF)은 종전의 입장을 확 바꿔 각 회원국들에게 인플레 안정에 최우선순위를 둘 것을 촉구했다. 각국 중앙은행들도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국 중앙은행(Fed)는 지난 3월 회의부터 두 차례에 걸쳐 금리를 인상한 데 이어 앞으로 계속 금리를 올려 나갈 계획이다. 캐나다, 뉴질랜드, 한국 등 각국 중앙은행들도 금리인상에 속속 동참하고 있다.
2년 전 하이먼 민스키의 리스크 이론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아무도 모르는(nobody knows)’ 코로나 사태를 맞아 세계 경제는 ‘원시형 경제’라는 용어가 나올 정도로 앞길이 보이지 않았다. 첫해에는 ‘I’자형, ‘L’자형, ‘W’자형, ‘U’자형, ‘나이키형’, ‘V’자형, 심지어는 ‘로켓 반등형’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의 예측 시각이 나오면서 성장률이 3.5%까지 추락했다.
지난해 1분기까지만 하더라도 디플레이션이 우려될 정도로 암울했던 세계 경제가 같은 해 4월 미국의 소비자물가(CPI)상승률이 예상보다 높게 나오자 갑작스럽게 인플레 논쟁이 불거졌다. Fed조차도 일시적 현상에 그칠 것으로 봤던 인플레가 지난 1년 동안 날로 높아져 이제는 세계 경제의 최대 난제로 부상했다.
<그림 1> 미국의 인플레이션 추이(자료 : 한국은행 뉴욕사무소)
종전과 달리 이번에 인플레가 심각한 것은 같은 통화정책 시차(9∼1년) 내에 모든 가능성이 한꺼번에 거론되는 ‘다중 복합 공선형’이기 때문이다. 가장 큰 요인은 코로나 사태가 갖고 있는 독특한 특성 때문이다. 뉴 노멀 디스토피아의 첫 사례인 코로나 사태는 초기 충격이 커 Fed가 임시회의를 거쳐 제로 금리와 무제한 양적 완화(QE)로 대처했다.
어빙 피셔의 화폐수량설(MV=PT, M은 통화량, V는 통화유통속도, P는 물가수준, T는 산출량)에 따르면 통화공급은 그대로 물가로 연결된다. 전염성이 강한 코로나 사태는 백신만 보급되면 세계 경제가 ‘절연’에서 ‘연계’ 체제로 이행되고 돈이 돌기 시작하면 작년 4월 이후처럼 ‘쇼크’라는 용어가 나올 만큼 인플레 문제가 불거진다.
인플레 성격을 놓고 ‘일시적’이냐 논쟁이 거세질 무렵 지난해 2분기 미국 경제성장률이 높게 나오자 정책요인에 의해 촉발된 인플레가 수요 견인 인플레로 옮겨지면서 하이퍼 인플레 우려까지 제기됐다. 오쿤의 법칙(GDP 갭=실제성장률-잠재성장률, Fed가 추정한 잠재성장률 1.75%) 상 지난해 성장률 5.7%는 4%에 가까운 인플레 갭에 해당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이퍼 인플레 우려도 잠시 지난해 여름 휴가철이 끝나자마자 노동시장을 중심으로 심화된 병목 현상과 공급망 부족 등으로 비용 요건이 크게 악화되자 곧바로 스태그플레이션 우려가 급부상했다. 하이퍼 인플레와 스태그플레이션 사이에 두고 그 정도에 따라 슬로플레이션과 디스인플레 우려도 난무하고 있다.
공급망 부족과 비용여건 악화가 세계 경제 성장과 물가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 가를 간단하게 총공급 곡선(AgS?노동시장과 생산함수에 의해 도출)과 총수요 곡선(AgD, 투자와 저축을 의미하는 ‘IS 곡선’, 유동성 선호와 화폐 공급을 의미하는 ‘LM 곡선’에 의해 도출) 이론을 통해 보면 쉽게 이해된다.
코로나 사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라 비용여건 악화돼 총공급 곡선이 좌측(AS2→AgS1)으로 이동하면 성장률이 떨어지는 대신 인플레이션율이 올라가는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이 발생한다. 반대로 비용여건이 개선돼 총공급 곡선이 우측(AgS1→AgS2)으로 이동되면 성장률이 높아지고 인플레이션율이 낮아지는 ‘골디락스’ 국면이 도래한다.
<그림 2> 총공급 곡선과 총수요 곡선(자료: 한국경제신문)
1913년 Fed가 설립 이래로 ‘인플레 안정’이라는 중앙은행의 전통적인 목표를 잘 수행한 의장일수록 시장의 예상을 그대로 따르는 ‘순응적 선택’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 하지만 금융위기를 계기로 Fed의 의중을 잘못 읽거나 의중을 읽었다 하더라도 과도하게 해석하는 경우 시장의 예상과 달리 `역행적 선택`을 하는 전례가 시간이 지나면서 많아졌다.
역행적 선택이론은 최근처럼 통화정책 결정에 필요한 완전한 정보를 보유하지 못할 때 발생하는 현상을 분석하는 정보 경제학의 한 부류로 조지 에걸로프 교수가 주장했다. 초기에는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2014년 Fed 의장으로 임명됐던 재닛 옐런(현재 조 바이든 정부의 재무장관)의 남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노벨경제학상까지 받은 이론이다.
Fed는 가장 중시하는 인플레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울 때는 통화정책 추진여건을 한 번 더 확인하는 ‘체크 스윙(check swing)` 차원에서 역행적 선택을 활용한다. 인플레 성격을 잘못 판단해 너무 빨리 출구전략을 추진하다간 ‘에클스 실수(Eccles’s failure)’를, 너무 늦게 추진하다간 ‘그린스펀 실수(Greenspan’s failure)’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두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이 공존하는 여건에서 각국 중앙은행의 선봉장인 Fed가 어떤 행로를 걷을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통화정책 목표와 우선순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Fed는 2012년부터 ‘인플레 안정’에다 ‘고용 창출’을 양대 책무로 설정했다. 양대 목표 간에 충돌될 때는 지난해 11월 회의 이전까지 후자에 우선순위를 둬 통화정책을 운용해 왔다.
우선 순위를 더 두고 있는 고용 목표가 달성되지 않는 여건에서는 최근처럼 인플레가 우려되더라도 기조를 변경하는 일은 쉽지 않다(통화정책 불가역성). 지난해 8월 잭슨홀 미팅에서 Fed가 2013년 당시와 마찬가지로 ‘트리블 버블(금융완화 버블+인플레 버블+테이퍼링 지연 버블)’을 키우고 있다는 우려 속에서도 금융완화를 고집했던 것도 이 이유에서다.
이번에 인플레를 Fed가 키웠다는 비판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선제성(preemptive)’이 생명인 통화정책에서 지난해 4월 이후 ‘쇼크’라 불리울 만큼 불거진 인플레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했다면 올해 3월 이후처럼 CPI상승률이 인플레 타깃팅선인 2%을 무려 4배 이상 웃도는 수준까지 급등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한다.
뒤늦게 인플레의 심각성을 인식한 Fed는 출구전략을 서두르고 있다. 첫 단추인 테이퍼링은 금융위기 이후 출구전략을 추진했던 때는 벤 버냉키 당시 Fed 의장이 처음 언급한 이후 마무리되기까지 1년 10개월이 걸렸으나, 이번에는 처음 언급됐던 지난해 9월 회의 이후 불과 7개월(실행은 4개월)만인 올해 3월에 마무리했다.
테이퍼링 종료 이후 첫 금리 인상과 연계시키는 두 번째 단계도 금융위기 때에는 1년 2개월이 넘게 걸렸으나 이번에는 곧바로 단행했다. 마지막 단계인 양적 긴축(QT)은 금융위기 때는 첫 금리 인상 이후 2년이 되는 2017년에 추진됐으나 이번에는 3개월도 못되는 올해 6월부터 추진된다.
금융위기 때와 달리 Fed가 출구전략을 서두르는 것은 이번 인플레가 ‘경기순환’보다 ‘공급망 붕괴에 따른 비용 상승 요인’이 크다는 판단에서다. 글로벌 공급망 분야의 석학인 미국 메세추세츠 공대(MIT)의 요시 셰피 교수에 따르면 특정 사건을 계기로 소비가 증가할 경우 소매, 유통, 제조, 원자재 순으로 공급망이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에서 수급 간 불균형이 심화되는 이른바 ‘채찍 효과(bullwhip effect)’가 나타나 인플레가 증폭된다고 주장했다.
채찍 효과가 총수요와 총공급 요인 간 악순환 고리의 주범이라면 인플레를 안정시키기 위한 방안은 역(逆)채찍 효과가 나타날 수 있도록 출구전략을 빠르고 강하게 가져가는 것이 최선의 방안이다. 합리적 기대가설에 따르면 코로나 사태 이후처럼 디지털 콘택트 추세의 급진전으로 심리적인 요인과 네트워킹 효과가 크게 나타날 때는 급진적인 출구전략 등을 통해 시장에 확실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 인플레 기대심리를 차단하는 데 효과적이다.
문제는 주로 총수요 대책인 출구전략을 서두르더라도 과연 인플레를 잡을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급진적 출구전략은 성장이론에서 실제성장률과 균형성장률, 잠재성장률이 같은 황금률(golden rule)이 유지돼야 지속 성장이 가능하다고 본 ‘해로드-도마의 칼날 이론’에 비유된다. 칼날 위를 타는 무속인이 떨어지면 상처가 깊게 난다.
Fed가 앞으로 급진적인 출구전략을 추진할 경우 가장 우려되는 것은 ‘성장 훼손’이다. 지난 3월 Fed 회의 이후 장단기 금리 간 역전현상이 자주 발생함에 따라 미국 경기 향방을 놓고 논쟁이 거세다. 중국, 유럽 등 주요국 경기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마저 흔들린다면 세계 경제는 장기침체를 예고하는 재침체(double dip) 국면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그림 3> 미국 경제성장률(자료 : 블룸버그) <그림 4> 미국의 경기침체 역사(자료 : 블룸버그)
더 우려되는 것은 1990년대 신흥국의 연쇄 위기를 몰고 왔던 미국과 다른 국가 간 금리가 따로 노는 ‘대발산(Great Divergence, GD)’이 재현되고 있는 점이다. 1994년 이후 미국 중앙은행(Fed)은 금리를 1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3.75%에서 6%로 대폭 끌어올렸다. 반면 Fed를 제외한 다른 선진국 중앙은행들은 금리를 내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5년 4월에는 일본 경제를 살리기 위한 ‘역(逆)플라자 합의’ 이후 달러 강세를 용인하는 ‘루빈 독트린’ 시대가 전개됐다. 루빈 독트린이란 당시 로버트 루빈 미국 재무장관이 달러 강세가 자국의 국익에 부합된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전개됐던 슈퍼달러 시대를 말한다. 타겟 통화인 엔화 환율은 달러당 79엔에서 148엔까지 급등했다.
그 결과 금리차와 환차익을 겨냥한 캐리 자금이 미국으로 몰리는 과정에서 1994년 중남미 외채위기,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1998년 러시아 모라토리움(국가채무 불이행) 사태까지 이어지는 신흥국 위기가 발생했다. 국제금융시장에서는 신흥국 위기를 초래했던 GD와 강달러를 주도했던 Fed 의장과 재무장관 이름을 따 ‘그린스펀 루빈 쇼크’라 부른다.
그 후 30년이 지난 최근에 Fed는 금리를 올려 나가고 있으나 유럽중앙은행(ECB)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후유증으로 금리 인상을 주저하고 있는 가운데 아베노믹스에 집착하고 있는 일본은행(BOJ)은 마이너스 금리제를 고집하고 있다. 경기 부양 차원에서 중국과 러시아 중앙은행은 금리를 내리고 있다.
달러 가치도 미국이 인플레이션을 안정시키기 위해 강세를 용인하는 과정에서 ‘제2의 루빈 독트린’이라 불리는 ‘옐런 독트린’이란 용어까지 나오고 있다. 엔?달러 환율의 경우 미스터 엔(사카키바라 에이스케) 라인인 130엔마저 넘어섰다. 앞으로 옐런 독트린 시대가 전개될 경우 달러 가치는 한 단계 더 뛸 것으로 예상된다.
각종 캐리자금이 미국으로 유입되는 과정에서 신흥국들이 겪는 외환 고충은 1990년대 상황보다 더 심각하다. 스리랑카가 국가 부도를 선언한 데 이어 파키스탄, 튀지니, 페루, 엘살바도르, 가나, 에티오피아 등이 동참할 태세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저소득 신흥국 73개국 중 56%에 해당하는 41개국이 심각한 부도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경고했다.
<그림 5> 원·달러 환율과 실질실효환율(자료 : 한국은행, 통화신용정책보고서)
한 가지 기대해 볼 수 있는 것은 Fed는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게임을 선택하지 않는 것이 관례다. Fed가 금리를 대폭 올려 ‘슈퍼 달러’ 시대가 전개되면 신흥국뿐만 아니라 미국에게도 최악의 상황이 닥칠 수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처럼 슈퍼 달러 시대를 초래했던 GD가 더 확대되지 않도록 금리 인상 속도를 조절해 나갈 가능성이 높다.
한상춘 한국경제TV 해설위원·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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